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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회일반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메모 : [한겨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노무현과 김대중
3당합당 맞서 20년 동행…MB정권 후 '고통'
지역·보스 정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충돌'
87일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떠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숙성시키며 '민주정부 10년' 역사를 함께 썼다. 그러면서도 호남의 현실주의자인 김 전 대통령과 영남의 이상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의 관계는 존경과 연민 속에서도 긴장과 갈등을 지속하는 미묘한 궤적을 그려왔다.
두 사람은 출신지역도, 정당도 달랐다. 1988년 가을까지 옷깃 한번 스친 적 없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였고,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맞수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 13대 국회에 입문한 상태였다.
먼저 다가선 것은 김 전 대통령이었다. 5공화국 비리 청문회를 통해 초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잠재력을 확인한 김 전 대통령은 그해 가을 국회 의원식당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라며 극찬했다.
두 사람을 정치적 동반자로 만든 것은 90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결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판했고,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91년 9월16일 야권 통합이 이뤄지면서 두 사람은 통합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역정치와 보스정치의 가운데에 서 있던 김 전 대통령과 지역정치, 보스정치 극복을 정치적 이상으로 간직한 노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호남 출신이 주류를 형성한 통합민주당에서 노 전 대통령은 '영남 민주세력'의 지분 확보와 당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김 전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14대 총선 후보 공천에서 주류 쪽 최고위원들이 비주류인 이해찬 의원을 배제하려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강력히 저항했다. "최고위원님들, 뭐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김대중 대표님 당권이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길어야 1년입니다. 이해찬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하면 난 탈당하겠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침묵했고, 결국 이해찬 의원을 공천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에게 모질게 말한 뒤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것 아니냐'며 걱정이 많았지만, 대개 김 전 대통령이 양보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기반 정당에 몸담은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소신을 김 전 대통령이 평가해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결정적인 갈림길에선 김 전 대통령 편에 섰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배신을 용납할 수 없다"며 합류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대선이 임박하자, 결국 김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했다. "3김 청산이 소신이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게 더 중차대한 임무"라는 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은 정권교체 뒤 낙선을 각오하고 부산 출마를 거듭한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하며,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하는 등 정치적으로 배려했다.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은 "김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종로를 버리고 영남에 출마하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을 높이 평가하면서 항상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여당인 민주당의 재집권 전망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차별화'를 꾀하지 않고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계승하겠다"고 외쳤다. 결국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둘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햇볕정책'과 차별화된 대북정책을 추진했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민주당의 호남 지역편중을 극복하려 했다. 동교동계는 "배신자 노무현"을 성토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삼갔다.
두 사람의 오해는 2006년 11월 노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방문을 계기로 해소됐다.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100년에 한번 나올 훌륭한 지도자다. 김 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을 지역적 한계를 보지 말고, 그가 이뤄낸 큰 산을 보라'며 '내가 먼저 김 전 대통령이 어떻게 사시는지 챙겨드리고 싶다'며 사저 방문을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10년 좌파정권 종식'을 외치며 등장한 이명박 정부에서 두 전직 대통령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지난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자 김 전 대통령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석달을 불살랐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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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 맞서 20년 동행…MB정권 후 '고통'
지역·보스 정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충돌'
87일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떠난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숙성시키며 '민주정부 10년' 역사를 함께 썼다. 그러면서도 호남의 현실주의자인 김 전 대통령과 영남의 이상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의 관계는 존경과 연민 속에서도 긴장과 갈등을 지속하는 미묘한 궤적을 그려왔다.
먼저 다가선 것은 김 전 대통령이었다. 5공화국 비리 청문회를 통해 초선 국회의원 노무현의 잠재력을 확인한 김 전 대통령은 그해 가을 국회 의원식당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라며 극찬했다.
두 사람을 정치적 동반자로 만든 것은 90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결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정치적 야합"이라고 비판했고, 노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91년 9월16일 야권 통합이 이뤄지면서 두 사람은 통합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역정치와 보스정치의 가운데에 서 있던 김 전 대통령과 지역정치, 보스정치 극복을 정치적 이상으로 간직한 노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충돌했다. 호남 출신이 주류를 형성한 통합민주당에서 노 전 대통령은 '영남 민주세력'의 지분 확보와 당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김 전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14대 총선 후보 공천에서 주류 쪽 최고위원들이 비주류인 이해찬 의원을 배제하려 하자 노 전 대통령은 강력히 저항했다. "최고위원님들, 뭐가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김대중 대표님 당권이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길어야 1년입니다. 이해찬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하면 난 탈당하겠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침묵했고, 결국 이해찬 의원을 공천했다.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에게 모질게 말한 뒤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것 아니냐'며 걱정이 많았지만, 대개 김 전 대통령이 양보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기반 정당에 몸담은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소신을 김 전 대통령이 평가해준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결정적인 갈림길에선 김 전 대통령 편에 섰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복귀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배신을 용납할 수 없다"며 합류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대선이 임박하자, 결국 김 전 대통령 진영에 합류했다. "3김 청산이 소신이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게 더 중차대한 임무"라는 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은 정권교체 뒤 낙선을 각오하고 부산 출마를 거듭한 노 전 대통령을 신뢰하며,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하는 등 정치적으로 배려했다.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은 "김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종로를 버리고 영남에 출마하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을 높이 평가하면서 항상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여당인 민주당의 재집권 전망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차별화'를 꾀하지 않고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계승하겠다"고 외쳤다. 결국 대선후보로 확정됐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둘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햇볕정책'과 차별화된 대북정책을 추진했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민주당의 호남 지역편중을 극복하려 했다. 동교동계는 "배신자 노무현"을 성토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삼갔다.
두 사람의 오해는 2006년 11월 노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방문을 계기로 해소됐다.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100년에 한번 나올 훌륭한 지도자다. 김 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을 지역적 한계를 보지 말고, 그가 이뤄낸 큰 산을 보라'며 '내가 먼저 김 전 대통령이 어떻게 사시는지 챙겨드리고 싶다'며 사저 방문을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10년 좌파정권 종식'을 외치며 등장한 이명박 정부에서 두 전직 대통령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지난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자 김 전 대통령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생애 마지막 석달을 불살랐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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