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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 20170516

by lucill-oz 2017.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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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묵직하다. 생각이 많아진다...

네 개의 다른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니만큼 직접적으로 확 와 닿는다.

국가 권력으로 인한 개인의 비극. 그 잔인함을 보여준다.

가해자(가해국가의 국민)도 피해자도 결국은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와중에 작가도 작품도 국가에 의한 "검열"이라는 이름의 피해자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 

 

1945년. 

식민지의 청년이 지배국을 위하여 자원 입대하여 카미카제 특공대가 된다.

뼛속까지 일본인인 듯이 보이는 그 청년은 

그러나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살며 각종 차별과 모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최선을 다 해 살아온 그에게는 일본인 친구와 애인이 있으며 그녀의 가족은 그를 가족으로 대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전쟁 말, 열세에 몰린 일본이 조선의 청년들을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이름으로 일본청년들과 똑같이 징집하기 위하여 

짐짓 차별없이 대하는 양하는 분위기 속에서나 가능했었던 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일본의 군인으로 죽어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면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일본인으로 대접받으며 살리라.

누구도 자신의 가족을 조선인이라 멸시하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기대감으로 참전하였으나

죽음을 앞둔 그는 이제 겨우 열 아홉살에 불과한 소년일 뿐이다.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아이일 뿐이다.

입대하는 자식에게 좋은 밥 한끼를 먹이려고 한달이나 상처 치료를 받지 않고 돈을 모은 그의 어머니.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아들은 여동생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집을 나서는데

한 술 만이라도 더 먹여 보내고 싶은 모정은 기도처럼 간절하다.

실력으로 일본인을 누르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을 받고

그 보상으로 누구보다 빨리 죽는 기회를 얻고자 애를 쓰던 그 시대의 그 청년들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길 소망하는 그 청년들에게 배신자라고, 친일을 했다고 그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차라리, 그 젊은이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든 국가, 

그 국가를 운영하고 있던 권력자들에게 던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개인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의 삶보다 국가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요구할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만일 국가가 없다면 개인인 너와 네 가족이 당할 설움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너는 너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라고 누군가 말하고 싶다면...

 

2004년.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라크전에 뛰어든 한 사내의 예를 보라.

그는 군인의 신분은 아니었으나 전쟁터에서 미군에 식품을 대주는 일을 하였다. 

그러니까 굳이 진영을 따지자면 미군을 위해 일을 하다가 이라크군에 피랍된다. 

그를 납치한 이라크인들은 사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으나 

지금은 온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분노하는 군인의 모습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일으켰고 

동맹국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역시 파병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의 평범한 시민들은 적국의 공격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잃어버렸고

살아남은 자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이 살기 위해 이 죄없는 한국의 청년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이라크에서의 철수를 요구하는 인질의 탄원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결국 너희 스스로가 너의 국민을 죽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 하지만 

국가는 원래 한 사람의 국민을 위해서 큰 싸움을 멈추지는 않는 법이다.

남의 전쟁에 말려들어 억울한 희생을 당한 그는, 

그것이 그저 그 자신의 선택이었으므로 보호받을 권리가 없어진 걸까.

그러게 위험한데 거길 왜 갔어... 아마 여론은 그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는 이 땅에서 살고자 떠난 것이다. 이 땅이 허락하지 않은 기회를 찾아서. 돌아오기 위해.

그런데 그의 나라는 그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

 

2010년.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의 초계함은 평화로웠다.

사병에서부터 장교까지, 시시콜콜한 고민거리를 얘기하고 들어주고...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와 부딪치며 배는 침몰했고 사십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서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죽었다.

영결식장, 살아남은 자와 유가족의 입에는 흰 마스크가 채워져 있다.

네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지 말 것, 네가 들은 것도 전하지 말 것.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 마스크를 누가 채웠는지.

훈장과 국립묘지. 그거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선물 말이다.

 

2016년.

삼대독자라서 피할 수도 있었던 군대에

특별히 갈 곳이 없어서 입대한, 제대를 한 달 앞둔 말년병장이 탈영을 했다.

극초반 아주 우발적으로 보이는 이 청년의 탈영은 사실 가장 가슴이 아팠다. 바로 현 시대여서일까.

집은 철거되고,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파트 경비실에 와 보니...

탈영한 자식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는 아버지는 

그러나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룻밤 재워 줄 곳도 없고, 한끼 밥을 차려줄 형편도 되지 않는다.

입대 전에도, 군생활 중에도, 제대를 코앞에 둔 이 싯점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든 아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일부러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어머니가 사이비 종교에, 혹은 기독교를 맹신하여 집을 나간 모양이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에 찾아가 어머니의 기억을 찾아보려 하나 목사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교회의 신도가 워낙 많아서, 권사도 또한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 집안을 파탄으로 이끈 사람 치고는 참으로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대답이다.

그 또한 한 조직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민낯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지만

탈영병의 총부리 앞에서는 그저 미약한, 살고 싶어하는 한 인간, 개인일 뿐이다.

어디에서도 마음의 위안을 얻지 못한 탈영병은 길가의 노숙인에게 자신을 신고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속마음을 터 놓는다.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 앞에서 스스로 자해하려는 그를 말리며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냐"고 울부짖는 그의 절규는 극을 지켜보는 많은 관객들의 절망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죽어가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을까? (**같은, 망할놈의, 등등의 욕이 아니라 말이다)      

그의 말처럼 삶은 전쟁이요, 우리 모두는 군인이다.

그래서 군복입은 군인들만 불쌍한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모든 인생이 불쌍하다.

 

 

 

두 시간이 채 안되는 공연시간이었지만 품고 있는 그 내용만큼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익숙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덕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궁금했던 손진환 배우(탈영병의 아버지). 

너무나 시크한 아버지다.  그는 아들의 뒷모습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잡을 수가 없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아팠다.

탈영병 역의 이원재 배우. 

앞이 보이지 않는 젊은이의 공허감, 허탈감 등이 그의 대사를 통해 진하게 전해진다.

노숙자 여인 역의 고수희 배우. 

좋다. 탈영병을 안아주는 마지막 씬. 그녀는 탈영병의 엄마같은 존재다.

열아홉살 소년병 역의 김동원 배우. 

어디서 봤더라... 낯이 익은데... 했더니 '햄릿-더 플레이'다.(역시 후기를 써 놔야 해)

특유의 말투. 인상적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20명이 넘는 배우가 출연한다. 대작이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T자 형의 무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느낌이다.

의상과 분장이 충분히 받쳐줘서일까?

아마도 그 내용으로 여백을 다 채운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오랜 세월,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는 국가권력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 아닐까?

대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집단의 논리에 세뇌된 것은 아닐까?

그 희생의 차례가 내 앞에 오더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착한 국민으로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희생의 당사자를 대하는 시각에 순수한 슬픔과 연민을 품지 못하는 것일까?

극을 보는 내내, 자연스럽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았다.

한두마디 말로 그것을 답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의 국가가

위로가 필요한 국민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나라였으면 한다.

나라가 상대적으로 힘이 없어서 개인이 불행한 일을 겪게 했다면 

어떤 의미로든 위로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국제적인 분쟁에 휩쓸렸을 때 우선은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고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그에게 벌을 주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자국의 법에 의해 처리하면 되니까말이다.

밖에 나가 싸움박질한 자식을 나중에 집에 데리고 와서 혼내 주더라도 일단은 내자식 편들어주는 부모처럼 말이다.

 

촛불시위로 시작해서 정권교체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란 이렇게 하는 거다'를 전 세계에 보여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절묘한 타이밍에 이제 국가관에 대한 나름의 사고를 시작해야 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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