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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뮤지컬

보이첵 - 20141107

by lucill-oz 201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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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다 끝나가도록 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뮤지컬 이야기쑈 이석준과 함께' 팟캐스트에 보이첵 편이 올라온 것을 듣고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공연은 마지막 주로 접어들었고 내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막공 바로 전날, 잔여 표가 몇장 남은 것을 확인한 후 오랫만에 강남으로 향했다.


아..........

이미 줄거리도 노래도 한번은 들어보고 간 것인데도 보면서 힘이 든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였을까.


말단 군인 보이첵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가족인 마리와 아들 알렉스를 부양한다.

군인의 월급으론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자 중대장의 면도사는 물론이고 생체실험의 피실험자가 되는 일까지 마다않는다.

그러나 점점 지치고 황폐해져 가는 그의 육체과 정신...

그런 그를 마치 장난감을 다루듯 비웃고 조롱하는 중대장과

그를 인간이 아닌 그야말로 실험용 쥐로 여기는 군의관.

그들은 몇푼 돈으로 보이첵의 육체 뿐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소유하려하고 학대하려 한다.

그런 중에도 보이첵은 마리와 아들을 생각하며 견뎌 내는데...


마을 축제에서 마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군악대장은 보이첵을 떠돌리고 

가짜 루비 목걸이로 마리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보낸다.

그럴듯해 보이는 남자의 유혹 앞에 순간적인 환상에 빠졌던 마리는 정신을 차리자 곧 후회한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첵에게 있어서는 세상의 전부이고 자랑이고 자부심인데...


군의관의 실험 결과를 발표하는 강연회에서 보이첵은 '인간'이 아닌 그저 피실험의 표본으로서 그 자리에 선다.

벌거벗겨진 그를 학생들은 만져보고 찔러보고... 마치 동물을 대하듯.

몇 개월 동안 완두콩만 먹고 쉴 새 없이 살아와 극도로 쇠약한 상태의 보이첵은 환상을 보기도 하고 

모세혈관 출혈로 인하여 온 세상이 붉어 보이는 상태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그의 육체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은 더 큰 정신적 충격을 주고자 마리와 군악대장의 불륜을 폭로한다.

미칠듯한 심정으로 뛰쳐나가는 보이첵.

1막의 마지막은 그렇게 배우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마저도 숨을 몰아쉬게 된다. 


'민주주의를 향하여 전진하자"라고 외치는 군인들의 행렬에 더 이상 보이첵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군인들이 사라진 빈 들에 처절한 모습으로 나타난 보이첵은 "마지막 남은 나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던 보이첵이었기에 그 대사는 매우 아프게 들렸다. 

마리를 향한 보이첵의 처음 마음은 분노였을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여인이었기에 그 배신감은 더욱 깊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만을 탓하기엔......


탈영한 상태의 보이첵이 마을의 술집에 나타나자 그의 친구 슈미트가 만류한다.

보이첵의 눈에 비친 그들은 마리와 군악대장과의 연상작용으로 모두 더럽고 불결하게 보일 뿐이다.

그의 귀에는 '창녀를 죽이라'는 환청이 들려오는데...


몰래 부대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는 보이첵.

슈미트에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고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러나 사실을 말해줄 수 없는 슈미트.


새벽녘, 귀대하는 군악대장을 기다렸으나 쇄약한 그의 몸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독주가 필요할 것이라고 조롱하며 돈을 뿌리고 사라지는 군악대장.

육체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극한의 상태에 다다른 보이첵의 귀에 환청이 들리고 눈에 헛것이 보인다.

가진 돈을 모두 쥐어주고 작은 칼 하나를 산 보이첵은 사라지고...


마을의 여인들과 함께 갈대밭에서 바구니를 만들던 마리는 

알렉스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보이첵을 찾아나선다.

지난 일을 후회하며 부르는 노래 '사랑한다면'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절망스러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보이첵.

그의 칼을 피하지 않는 마리...

그녀를 끌어안고 부르는 "루비 목걸이"는 복잡한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창백한 살결,

흩어진 머릿결

말해봐, 달콤한 키스라도

뭐든 좀 해봐


너무 눈부셔 

니 목을 감싼 

핏빛 어린 양귀비 

사슬에 엮인 꽃 한송이 

오, 루비 목걸이


말해봐, 당신이 그걸 얻기 위해 뭘 했는지

아니 아무말 하지마, 아무 상관 없어 뭘 했던지

그 아름다운 목걸이를 누가 줬든 

순결따위가 중요해 

내사랑 변함없어


아직도 꿈결 

수줍은 눈결

일어나 신나는 춤이라도 제발 좀 춰봐


너무 황홀해

니 목에 흐르는 레드와인 한방울

향기가 없는 꽃 한송이 

루비 목걸이


말해봐, 당신이 그걸 얻기 위해 뭘 했는지

아니 아무말 하지마, 아무 상관 없어 뭘 했던지

그 아름다운 목걸이를 누가 줬든 

순결따위가 중요해

내사랑 변함없어


차디찬 숨결 

멈춰진 숨결

우리 둘 함께 호수 깊이 

그 어떤 죄악도

다 씻어낼 물결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시신을 건져 '갈대의 노래'로 장례를 치뤄주고

그 곁을 행진하는 군악대의 행진은 무심하게 대비를 이룬다.




평이 갈리는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무척 좋았다.

같은 비극이라도, 비극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뭔가... 

뭔가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이었다.

보이첵이... 그저 남같지 않다고 할까...

 

이 극은 절대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탄탄해야 몰입할 수 있는 극이다.

그래서 보이첵이 보여주는 육체적, 감정적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진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배우들 뿐만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도 감정소모가 많이 된다.

그래서 더욱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기도 하다.


보이첵의 캐스팅을 보지 않고 선택한 공연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 했으나 엠 버터플라이 이후 매력을 느꼈던 김다현은 보이첵을 정말 잘 표현했다.

이제부턴 미인파가 아니라 연기파 배우로 인정하기로^^

실제로 완두콩 체험까지 해가면서 몸을 만들었다고 하니 더욱 인정!

김수용이 보이첵과 싱크로율이 높은 배우였다면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김다현은 마리가 이래서 보이첵에게 반했겠구나 싶은...^^


김소향 마리, 정말 좋았다.

모짜르트에서 못 만났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었는데 

감정적 표현을 하면서도 흔들림없는 가창력이 빛났다.


군악대장 김법래는 정말 그 목소리며 말투며...

진짜로 군악대장은 그런 모습이었을 듯 하다. 대단히 느끼하기도 하고^^


군의관(박성환)과 소대장(정의욱)의 주고받는 합은 욕을 불러일으키는 씬이기도 하지만

분위기의 전환을 시켜주기도 해서 좋았다.


아, 길대밭 씬에서 등장하는 할머니 역의 임선애 배우, 정말 딱이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아우라와 연륜? 인자함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느껴졌다.



영국의 인디밴드가 작곡을 했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뭐랄까...

기존에 익숙하던 대형 뮤지컬의 사운드와는 좀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들을 수록 좋다.

공연도 다 끝난 뒤늦게서야 홍보영상 찾아보고 제작발표회 영상 찾아보고...

뒷북도 한참 뒷북이지만 다음 시즌이 있을테니까..^^


참 희한한 방식의 창작뮤지컬이다.

스토리와 음악을 영국에서 공모하여 선발하고 한국의 제작팀이 다듬고 발전시킨 작품이라는데

어차피 유럽이 배경이니까 유럽인의 정서로 시작하는게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공연이 초연이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겠다.




이 불쌍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얘기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보이첵들이 있는가.

인간의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때론 나도 보이첵이 된다는 말이다.

그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마리의 일탈은 그저 하룻밤의 허욕에 젖은 그녀의 잘못일 뿐일까.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환상에 빠졌었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사람들아, 가여운 사람들에게 '모든 게 네 탓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대들이 그 가여운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사는지 안다면 말이다.


더욱이 가슴이 아픈 사실은 약자의 분노가 그 원인 제공자에게 향하지 못하고 또다른 약자에게 가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나 강하므로, 아니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자신의 힘으로 가해할 수 있을 만한 또다른 약자를 찾게 된다.

 

보이첵이 마리를 죽인 것은 그저 제정신이 아니었다거나 단순히 분노의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배신감과 분노도 있었겠지만 안쓰러움과 미안함,

그리고 약자들이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 홀로 남겨질 그녀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 ...

다른 남자가 쉽게 줄 수 있는 그 목걸이 하나를 사 줄 수 없는 남자의 슬픔과 비애

그녀의 목에 걸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핏방울 선명한 그...... 

 

보이첵이 군악대장을, 중대장을, 박사를 죽일 수 있었다면 

마리의 바람대로 어디 먼 곳으로 떠나 다른 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까...

그들의 아들 알렉스 역시 보이첵처럼,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갈 터인데...

하층민들의 끝나지 않는 비애... 영원히 계속될 이 악순환.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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