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초연 때, 일찌감치 시즌권 예매를 하고도 사정상 못 보고 지나간 작품이었다.
올해도 역시 시즌권 예매는 해 놓고 개별예매를 안 하고 있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관극을 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예매임을 핑계로...
아 참, 이 날은 결혼 20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혼자서 관극을...ㅋㅋ
'왜'로 끝나는 제목이 주는 강렬한 임팩트가 있어서인지 그 속사정이 궁금해지는 효과가 있다.
빼대만 남은 폐건물, 혹은 가건물 같은 인상을 주는 무대는 매우 오래된, 철거가 임박한 연립주택이다.
좌측 칸에는 실업자 동교(유성주)와
"교수는 아무도 못 건드린다"며 정교수가 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그의 아내 지영(최나라)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이혼을 앞두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영화 일을 하는, 사회에 불만 많은 현태(이창훈)와 공시생인 그의 형,
그리고 형제의 어머니(백지원)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작은 아들이 평범하고 안정된 일을 하길 원한다.
우측 칸은 온동네를 주름잡는 드센 여인 현자(고수희)와 그의 남편(이창직)이 자식 없이 애완견과 함께 살고 있다.
(손가락 사이에 강아지 꼬리를 넣어 살랑거리는 스킬!)
나란히 배치되어 있지만 동교네는 303호, 현태네는 301호, 현자네는 201호다.
그리고 늦게 들어와 아침마다 차를 빼주러 지영에게 짜증을 내며 나가는 지하방 청년이 살고, 204호엔 동사무소 직원 주연이 산다.
304호 광자(문경희)는 작년까지 현자가 차지했던 옥상에 고추를 심었다. 그리고 이웃들과 나눠 먹고자 한다.
현자의 남편은 아침마다 커피믹스 두 잔을 종이컵에 타서 밖으로 나가 사람좋은 성복(이동규)과 나눠 마신다.
현자는 그런 남편에게 "커피믹스도 다 돈이야!"라고 한 마디씩 한다.
앞마당에는 똑같은 뽀글머리 파마를 한 할머니 셋이 평상에 앉아 있다.
현자가 이끄는 대로 이런저런 공짜살림을 받을 수 있는 행사장을 따라 다니고
현자는 광자가 심어 놓은 고추를 싹 다 따다가 그녀들에게 나눠주며 인심을 쓴다.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움직이며 동시에 사건이 발생한다.
현태는 감독 미팅까지 마치고 출연을 약속한 작품이 전화 한 통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 분노한다.
어느 날, 또다시 옥상에서 고추를 싹쓸이 하다가 광자에게 들킨 현자는
그만 따라는 광자의 한 마디에 오히려 광자에게 욕을 해대며 악다구니를 한다. (아니, 혼자 사는게 뭐 어떻다구!!)
뒷목을 잡고 쓰러진 광자, 그리고 그 때 옥상으로 올라오다 이 장면을 목격한 동교. 곧이어 올라온 현태.
시침을 뚝 떼고 모른 척 내려가는 현자. 병원으로 실려 간 광자.
광자가 쓰러진 후 고추는 진딧물 투성이가 되고, 현태는 이 사실에 광분한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광자에게는 고추가 그런 의미였다고. 그런 것들은 짓밟는 사람들은 악마라고.
그러니 현자에게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동교와 지영은 같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과 다를 바 없는 부부다.
집을 내놓았지만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무기력해 보이는 동교.
현태는 고추 때문에 쓰러진 304호 광자의 문제는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며 건물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현자에게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나서지만 현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데...
이 때 현태에게 다가서는 동교. 현태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합류 의사를 밝힌다.
동교는 전문 데모꾼들을 동원해서 피켓시위를 벌인다.
아무리 압박을 해도 현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사회에 이런저런 이슈로 목소리를 높이던 데모꾼들마저
이핑계 저핑계로 하나 둘 떠나고, 그 와중에 시위의 본질마저 흐려지기 시작하자
현태는 현자에 대한 신상털이를 하여 동교의 말에 따르면 '선을 넘는' 행동을 한다.
광자가 현자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서 시위를 하는지 그 목적마저도 희미해지고 현태 일행은 지쳐간다.
동교는 현자가 가장 아끼는 것을 없애서 똑같은 무게의 상처를 현자에게 주고자 한다.
선을 넘더라도, 그래야 한다고.
그들은 현자의 개를 훔친다. 그리고 개를 잃고 괴로워하는 현자에게 개를 담보로 사과를 받아낸다.
원래 계획은 개를 잠시 데리고 있다가 사과를 받으면 돌려줄 계획이었으나 동교는 몰래 개를 놓아주었다.
현자에게 영원한 고통을 준 것이다.
그리고 갈 곳 없는 동교는 감옥행을 택한다...
현자는 왜 그렇게 광자의 고추가 못마땅했을까.
사실 현자는 세를 사는 이웃들과 달리 비록 다 쓰러져가는 연립주택일 망정 자가 소유자이고
인근 신축 아파트에 청약을 하여 시세 차익을 노리는 등 나름 등장인물 중 가장 살 만한 인물이다.
지금 사는 이 집도 재개발이 빨리 이루어져 높은 보상을 받아내고 싶은데
그러려면 건물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유리하니
이웃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면서까지 이 낡은 건물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올려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옥상 창고를 차지하고 있는 현태의 짐도 못마땅하고, 재개발을 반대하는 광자의 고추도 못마땅하다.
정작 그러는 본인이 이웃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하다.
그럼 현자는 절대악일까? 절대로 그렇게 말 할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극이다.
나름 치열하게 젊은 날을 살아온 그녀는 (산업화 시대를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해 자부심이 커 보인다.
따라서 그녀의 눈에는 현태나 동교들의 행태가 한심스럽다못해 분개스러웠을 것이다.
젊은 것들이 땅을 파더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요행이나 바라고, 남탓이나 하고 말이야...
많은 장,노년 층에서 볼때는(적어도 중년은 빼자!) 현자의 말에 더 공감하는 바가 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우리 사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적이 아니다. 단지 그런 삶을 살아오며 체화된 의식이 변하지 않고 굳어진 채
공감의식 없이, 자신이 겪어 온 세상이 전부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 죄라면 죄다.
현태는 사회에 불만이 많다.
특히나 그가 몸담은 영화판이란 (사실 알고 보면 어디 영화판 뿐이랴) 현태가 겪고 있듯이 하루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다.
나만 성실히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뭐가 되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삐뚤어진 자신의 세상에 항상 화가 나 있다. 어디로든 그 화살을 꽂아버리고 싶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말한다.
니가 세상이라고, 니가 살아야 세상도 있는 거라고.
동교 역시 과거에 '잘못 처리한 행정'의 후유증으로 일을 놓아버린 상태다.
'행정'이란 말로 대변되는, 어떤 시스템을 잘못 처리했다는 당혹감에 그것을 되돌리려고
여러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 약점이 되어 돌아오고,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조직을 튀쳐 나와버렸고,
그런 그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그를 떠나버린 것이다.
그의 세상은 파괴되어 가고, 그런 세상에 대한 복수심일까?
동교는 광자의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한 현자의 세계를 파괴하려 한다.
처음에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현태에게 경고했었으나
결국엔 그 자신이 스스로 선을 넘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쩐지 자학처럼 느껴져 슬펐다.
한낱 콘크리트 옥상밭에 몇그루 심은 고추를 키우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유일하게 살아가는 낙일수도 있었듯이
(실제로 그 일이 광자에게 그런 의미였었는지 광자의 입을 통해 나오진 않았으나 어쩌면 그 모호함이
이 사건을 더욱 확대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현태에게는 마치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불의한 자신의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일처럼 느껴지고
동교에게는 유일하게 그가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신경을 쏟을 꺼리"가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그의 마지막 결론은 많이 허무하고 안쓰럽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긴 하루를 보내야 하는 그들에게는 그 시위가 더욱더 자신들을 위한 일인 듯 하다.
(나도 모를 깊은 공감...)
고수희의 연기는 무대에서 더 존재감이 느껴진다. 어찌나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운지!
물론 다른 배우들 역시 모두 믿고 보는 애정배우들인지라 아쉬움 없는 무대였다.
여러 군상들의 모습을 정말 실감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무대 구석구석에서 깨알같이 하고 있는 각자의 액션들을 좆는 재미도 있다.
만족스러운 관극이었다.
'관람후기 >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개 -20181010 (0) | 2018.10.23 |
---|---|
그게 아닌데 - 2018718 (0) | 2018.07.18 |
에쿠우스 - 20180328 (0) | 2018.03.28 |
닭쿠우스 - 20180314 (0) | 2018.03.15 |
블라인드 - 20180127 (0) | 2018.0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