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행운으로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이었다.
작가이자 연출인 조광화씨의 20주년 기념공연.
주변과의 소통이 어려웠던 시기에 쓰게 된 이야기라고.
발상과 구성이 지루하지 않고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노름쟁이 아버지와 평생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집안을 지킨 어머니.
유약한 남동생 유정은 단단이 운영하는 카페의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
여동생 달래는 자폐아로 의사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나 노래를 곧잘 한다.
어머니가 성치 않은 어린 막내딸을 아들들에게 던져두고 가게에만 매달려 살아온 탓에
달래는 늘 엄마에게는 거리를 두고 오라비들만 따라다닌다.
장정은 이런 집안의 장남이다.
알파치노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존경받는 가장이 되는 꿈을 갖고 있는 장정은 건달이다.
아버지는 화투를 잡을 손가락이 있는 한 노름을 멈출 생각이 없으며 가정폭력은 더 심해진다.
남편의 노름빚 뒷바라지와 생계를 도맡아 왔던 어머니는 인내심의 한계가 오자 가출을 결심한다.
장정은 이제 자신이 가장이 되어, 알파치노가 그의 "패밀리"를 건사했듯이
자신도 자신의 "패밀리"의 존경을 받는 가장이 되고자 한다.
그는 아버지의 노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손목을 자르는 것 뿐이라 생각하고
어느날 밤 자고 있는 아버지의 양 손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경쟁자를 쳐서 드디어 "보스"가 되지만
어머니는 결국 집을 나가고 장정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다.
삼년만에 조기 출옥한 장정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견제세력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유정은 카페주인 단단을 집에 들여 살림을 차리고 있다.
장정, 모든 것이 못마땅하다.
단단을 쫒아내고 유정을 나무라지만 유정은 반항한다.
게다가 똘마니 중 한 명인 달수가 달래를 넘봐 겁탈하려다 딱 들켜버리자 장정은 이성을 잃는다.
반쯤 죽을 때까지 패다가 후회를 한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보스인데, 너무 의연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어...
그러나 믿거니했던 친구 병춘과 달수는 장정을 배신하고 장정의 등에 칼을 꽂을 궁리를 한다.
단단이 없으면 유정이 정신을 차릴거라 생각한 장정은 카페를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단단을 겁박하나
단단은 오히려 장정의 폭력성과 삐뚤어진 남자관을 나무란다.
화가 난 장정, 그녀에게 수치심을 느껴보라며 그녀를 겁탈하려다가 기겁을 한다. 그녀 역시 남자였던 것.
그 모습을 목격한 유정은 칼을 들고 장정을 죽이겠다며 쫒아오지만 곧 장정에게 제압당하고
달래 앞에서 유정을 때리고 달수를 때리는 큰오라비의 모습을 본 달래는 장정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얼떨결에 장정의 일본도로 장정을 찔러 죽이고 만다.
장정의 장례식에
집을 나간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찾아 헤메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장정의 인생, 무엇이 잘못 되었던 것일까.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으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었다는 것을 죽는 순간에는 알았을까.
남자충동. 불쑥 솟아오르는 허세와 폭력에의 충동.
이런 남자, 저런 남자, 그렇고 그런 남자...
남자. 이야기는 남자가 쓴 남자 얘기다.
어려서부터, 울지도 말아야 하고, 부엌에도 들어가지 말아야 하고,
여자애들과 어울리지도 말아야 하며, 소심해서도 안되고, 섬세함 대신 대범함을 강요당해 온 집단.
여자를 동반이 아닌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생계부양에 대한 책임감을 또한 강요당해 온
한마디로 '남자다움'을 강요당해 온 집단.
어쩌면 그래서 더욱 철이 안 들고, 진짜 자기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이름.
세상에 성(젠더)이 여자 아니면 남잔데, 왜 그렇게 남자는 늘 남자남자거리며 사는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나는 이런 남자들을 지금도 많이 겪으면 산다.
말로 안되면 무력으로 해결하려 하고, 주먹 쎈 것, 상대에게 상처준 것을 훈장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곧 '쎈' 것이고 '남자다운' 것이라 믿는 남자들.
여자도 많이 강요당하며 산다.
여성스러움, 여자다움, 조신함, 순종과 복종, 살림과 육아, 사회생활에의 제약 등등.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적응하며 살듯이
여자들도 그냥 그런가 보다,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하고 사는 부류도 많지만
여자를 둘러싼 그 억압적인 분위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여자들도 많다.
그래서 그러한 환경에서 제 자리를 잡기 위해서,
그녀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욕망인가, 내가 원한 나의 선택인가?
그래야 전투력이 생기니까.
남자의 폭력성을, 헛되고 삐뚤어진 방식의 남자의 욕망을 지적하고자 등장한 캐릭터가 단단이란다.
남자의 반대인 여자의 입을 통해 남자를 지적질한다는 것이 너무 뻔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각을 의식해서
기왕이면 같은 남자의 입을 통해서
남자답지 못한 남자, 남자도 아닌 남자, 남자를 버린 남자의 캐릭터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 아니 그는, 아니 그녀라고 해 두자. 그가 그녀이길 원했으니까.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유정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장정처럼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투로 용기를 주고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일 말이다.
박해수. 거친 남자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배우다. 장정과 이미지상 씽크로율이 높은.
무거움과 코믹함을 오가는 장정, 좋았다.
TV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황정민 어머니와 손병호 아버지.
전역산은 유정을 연기하기엔 체격이 너무 우람한 거 아닌가 싶었다.
송상은 달래는 목소리도 예쁘고 노래도 잘 하네.
단단이 웃통을 벗는 순간, 언니의 복근에 사람들이 순간 놀라서 환호를! ㅋㅋㅋ
울랄라의 박광선이 연기를 시작한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 나름 스타 마케팅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출연진이 정말 화려하다.
무대가 정말 좋았다.
옛날 동네의 골목길, 일본군 장교가 살던 집이라는 설정의 다다미방과 일본도가 발견되는 툇마루.
카페의 면적이 좀 좁아서 아쉬웠지만 나머지는 좋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까지.
빼놓을 수 없는 베이스 연주.
긴장감과 끈끈함과 슬픔이 베이스 한 대로도 충분히 연출될 수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랫만에 TOM의 훌륭한 단차를 느끼며 편안한 관극을 했으나 역시 이름붙은 날은 관크가 문제다.
BC카드의 1+1 할인행사가 있는 날이기에 어쩌다 가끔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인지
여기저기서 대화소리, 휴대폰 불빛이 집중을 방해했다.
그래도 저렴하게 양질의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날이었으니 불평은 적당히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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