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고전을 소재로 한 작품은 많았지만 중국 고전을 소재로 한 작품을 감상한 것은
아마 영화 패왕별희 이후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무인 도안고의 모함으로 그 자신을 비롯하여 일족 삼백명이 화를 입게 된 문인 조 순의 가문.
졸지에 자식의 목숨을 내어주고 남의 아이를 복수의 씨앗으로 키워야 하는 비극적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정영.
정영을 그렇게 만든 것은 사실 그의 자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영이 은혜를 입었던 조순 일가의 억울한 죽음과
그의 한 점 혈육을 지키는 일에 아이의 부모인 공주와 부마 조 삭은 물론이고 성문을 지키던 한궐 장군도,
초야의 대학자 공손저구도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상황에서
정영은 아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조순의 손자 대신에 자신의 아이를 내 주고 만 것이다.
공주와 부마는 자기 자식이니까, 자기 가문의 씨앗이니까 자식을 지키려고 그랬다고 치자.
성문을 지키던 장수는 정영이 공주의 아기를 데리고 나갔다는 사실을 묵인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갈등하는 정영에게 내가 이렇게 너의 안전을 지켜 준다는 증거로 말이다.
공손저구 또한 돌부리에 머리를 찧어 죽음으로 아기의 목숨을 지킨다.
이렇게 아기를 살리려 애썼던 이들이 모두 정영의 안전을 위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바칠 수 있었던 것이
조순이 충신이었고 도안고가 간신이기 때문이었는가.
아이를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나.
사건에 정신없이 휘말리는 사이 정영 역시 늦둥이 아들을 스스로 내놓고 조씨 고아를 지키게 된다.
그가 제정신이었을까? 졸지에 아이를 잃게 된 정영의 아내는 무슨 죄인가.
그녀가 제정신으로 살 수가 있었겠는가. 무엇보다도, 정영의 아기는 무슨 죄인가.
제 아이를 조씨 가문의 아이로 내놓아야 하는 정영의 마음은 또 말해 뭣하겠는가...
그렇게 많은 피를 바쳐 복수를 위한 한 점 씨앗을 남겨놓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더구나 반전은 도안고가 조씨 고아를 정영의 아들로 알고 자신의 양자로 삼게 되는 일이다.
1막까지의 내용은 그렇게 어처구니없고 안타깝고 의문스러웠다.
20년이 지나 도안고의 양자로 자란 조씨고아의 모습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해맑다.
이제나 저제나 20년을 기다려 온 정영.
아무것도 모르는 조씨 고아를 설득하여 가문의 복수를 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결국 도안고는 20년을 제 아들로 키워 온 조씨 고아에 의해 조순에게 한 것과 똑같이 9족이 화를 당한다.
집안의 과업을 마친 고아는 자랑스럽고 개운하겠지만
마음 속에 먼저 간 여러 사람의 원한과 자신의 울화를 간직한 채 살아 온 정영의 마음은 허무하다.
도안고는 정영에게도 또한 원수가 아니었는가. 그의 자식은, 그의 처는 도안고 때문에 죽었지 않은가.
그는 왜 도안고를 직접 죽이지 않았을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텐데.
이 모든 일의 단초를 제공한 주군 영공. 경솔하고 단순한 인물.
고아에게는 이름을 주고 정영에게는 단 열두 마지기의 전답이 상으로 내려진다.
허무함이 배가 되는 장면이다.
정영의 영혼은 먼저 간 그 누구의 환대도 받지 못한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외면한다.
복수란 무엇인가. 또 다른 피의 씨앗이고 허무함의 씨앗인가.
아니면 목숨을 걸고라도 꼭 해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쉬이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마는... 어쩌면 마지막 대사처럼
그럴 일을 하지도 당하지도 말고 그저 좋게만 살다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게다.
고선웅 연출의 작품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간결하고 시니컬한 대사와 희비극을 넘나드는 무게감이 특징이 아닌가 싶다.
무겁지만 무겁지 않게, 그렇지만 가볍지 않게, 긴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은 속도감으로
그러나 관객이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어서 좋았다.
간결하고 상징적인 무대, 무게감 있는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가 또한 인상적이었다.
지난 초연 때, 공손저구 역을 맡았던 고 임홍식 배우가 공연 중 자신의 분량을 마친 후
무대 뒤에서 쓰러져 명을 달리한 일로 이슈화된 일이 있었다.
오늘 무대를 보니, 그의 공손저구가 어땠을지 상상이 갈 듯 하다.
또한 초연의 평이 매우 좋았고, 중국공연에서도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하기도 해서 궁금하던 차에
재공연이 올라온다 하여 일찌감치 예매를 해 놓은 작품이어는데, 정말 만족도가 높았다.
똑같이 복수를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햄릿"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고 느껴진다.
여러 각도로 생각할 꺼리도, 해석의 방향도 많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까.
고전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려면 해석의 방향이 중요하다.
그러한 면에서는 사실 이야기의 내용이 현대에 적용하기에는 좀 거리감이 있게 느껴지긴 했지만
고비마다, 대목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싶은 포인트가 많았다.
그러나 배가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역시 이렇게 와야 했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야 정영의 허무와 회한과 여러 복잡한 감정의 복합체에 무사히 다다를 테니까.
도안고 역의 장두이 배우의 인상이 매우 강렬했다.
정영을 연기한 하성광 배우는 처음이었지만 그 해석에 정말 생각이 많았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공손저구 역의 정진각, 영공 역의 이영석, 조 순 역의 유순웅, 김정호 등 묵직한 장년배우들이 포진한 무대는
안정된 느낌의 정통 연극을 관람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앞으로도 국립극단 작품들을 계속해서 챙겨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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