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홉의 작품으로 연극계의 고전이라는 것 뿐,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줄거리도 등장인물도 모른 채 예매를 했었다.
공연 시작 전 시간이 좀 남아서 극장 앞에 있는 '물고기 카페'라는,
수족관과 카페를 겸하고 있는 애매한 카페에 앉아서 검색을 좀 해 봤다.
때론 평론가라든가, 기자라든가, 홍보글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작품이해에 도움을 줄 때도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 정보가 제공하는 범위에 나도 모르게 시야가 좁혀지고 틀에 맞춰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고전에 있어서 작품 뒤에 숨어있는 은유가 꼭 오늘날의 가치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홉은 이 작품을 새로운 시대에 변화하지 못하는 몰락해가는 귀족들의 모습을 풍자하기 위해서 쓴 작품이라고 하는데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내가 잘 몰라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연극이 그런 풍자적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았다.
초연을 연출했던 연출가가 이것을 오히려 비극으로 풀어냈다고 하던데
나 역시 '어느 귀족의 아름다운 몰락'이라고 하는 부제처럼
'장'을 바꿔야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다운 모습으로 파티를 여는 그 심정에 조금은 동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시스템이 바뀔 때마다 재빠르게 그 흐름을 읽어 옷을 갈아입는 것을 현명함이라고 이름한다면
구 시대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지나간 것을 추억하며 사는 것을,
쉽게 변화하지 못하는 것을 굳이 비난하고 조롱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변화를 추구하는 쪽은 거의가 새로운 기회를 추구하는 젊은 층이고
살아온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은 쪽은 나이가 든, 즉 젊은 시절엔 나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 결과로 오늘의 안정을 얻은 것이라고 믿는 측이다. (물론 순수한 유산일 경우도 있지만.)
애매한 지경에 놓여있는 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더 이상은 애쓰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그러기엔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에
가진 것이 많고 적고를 떠나 삶을 대하는 자세의 ... 저마다의 입장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진다.
소극장 공연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인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같은 상황이지만 처해진 상황이 다르고 그 입장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도 다른.
길지 않은 장면장면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단편적이지만 리얼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스케일을 생각해 볼 때, 대극장에서 무대, 소품도 제대로 꾸미고 실사감 높은 공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그렇게 올라간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캐릭터를 좀 더 들여다 보자.
라녭스까야
이 아름다운 벚꽃동산을 소유한 지주.
현재는 가세가 기울어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지만 그녀의 지갑은 너무도 쉽게 열린다. 오랜 습관처럼.
그녀는 위기에 놓인 벚꽃동산을 놔두고 파리의 연인과 함께 지내다가 5년만에 돌아왔다.
사랑이 많은 그녀는 파리의 애인 뿐 아니라 수양딸 바랴에게, 농노의 아들 로빠힌에게, 죽은 아들의 가정교사 뻬짜에게,
그의 집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웃과 걸인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그렇게 사랑과 품위를 지키고 살 수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농장을 살리기 위한 로빠힌의 제안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변화하는 세태를 읽지 못해서 였을까?
혹시 그녀 내면의 귀족으로서의 일종의 우월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의 제안은 귀족으로서 품위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또 너무 대책이 없다. 안타깝게도.
불안 초조함 속에서도 마지막 파티를 여는 모습은 웬지 숙연해 보였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모습은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
어리석어 보이기도, 아름다워 보이기도, 안타까워 보이기도, 또 대범해 보이기도 한 그녀가
적어도 나는 그리 우스워 보이진 않았다.
바랴
라녭스카야의 수양딸이자 실질적으로 집안의 살림을 맡고 있다.
그래서 기울어가고 있는 이 집안의 현실을 가장 잘 알고 있지만 그녀에겐 어떤 결정권도 없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이 가문을 돌보는데서만이 그 의미가 있다. 자신을 위한 선택은 없다.
로빠힌과의 관계...안타깝다.
그러나 그녀가 좀 더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싶다.
딸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으로...^^
아냐
아직 어린애지만 그래도 엄마보다는 현실을 직시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교사 뻬짜의 영향.
그래도 그녀 덕분에 떠남이 활기차다. 사랑스러운 아가씨.
가예프, 그리고 피르스
가예프는 라녭스카야보다 더 강하게, 몰락하는 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의 오빠다.
벚꽃동산을 어떻게 해서 오빠가 아닌 여동생이 물려받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물려받았다 해도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다.
그의 귀족으로서의 모습은 오로지 늙은 하인 피르스가 지켜줄 뿐이다.
피르스의 무의식 속에서의 모습 그대로, 나이먹었으나 유아적인 도련님의 모습.
피르스는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이지만 그의 무의식은 언제나 그의 주인 가예프를 향해 있다.
뼛속까지 주인님을 모시는 하인의 모습, 마치 사랑하는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 가장 먹먹하다.
로빠힌
반전의 사나이!!
관객의 눈에는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나 극중 인물들 중에선 가장 겉도는 인물.
이 집안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농노해방과 함께 그는
명석한 두뇌와 판단력으로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큰 부자가 되었다.
바랴를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순진남이기도 하다.
옛 주인에 대한 의리로 라녭스카야에게 벚꽃동산을 살릴 수 있는 제안을 꾸준히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는다.
벚꽃동산은 결국 경매로 넘어가고, 그는 벚꽃동산의 새 주인이 된다.
어린 시절 머슴을 살던 집이 내 소유가 되다니!
그러나 그에게 벚꽃동산은 최종의 목표물이 아니다. 그저 상징적인 것일 뿐.
바랴를 맞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나는 그의 모습이 내 눈에는 안타까워 보였다.
성공이라 부르는 그것이 주는 만족감이 언제까지 그를 달리게 할 것인가.
그에게는 오직 쟁취와 소유만이 그 삶의 목적인 것 같다.
뻬짜
라녭스카야의 죽은 아들의 가정교사.
서른이 다 되도록 아직 졸업도 못한, 어떻게 보면 좀 한심해 보이는 가난한 이상주의자 대학생인데, 뜻밖에도 아냐와 연인사이다.
그가 아냐와 가까워 짐으로써 아냐의 정신적 성숙에는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이 나이먹은 대학생의 의도가 진심으로 순수한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아샤, 두나샤
라녭스카야와 파리생활을 했던 아샤는 이미 파리지앵이 다 됐다. 게다가 그의 마인드는 이미 반은 귀족이다.
언제나 귀족생활을 동경하는 하녀 두나샤는 아샤를 좋아하지만 정작 아샤는 그녀를 자신의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샤를로따
아냐의 가정교사라기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집시여인이다.
독특하고 매력있다.
그러나 그녀의 등장이 이야기와 어떤 부분에서 연결이 되는지 그 배경은 잘 모르겠다.
에피호도프
'스물 두 가지 불행'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그에게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웃음코드로 넣은 캐릭터인 듯 하다.
삐쉭
빚에 허덕이는 이웃집 남자. 눈치없게 라녭스카야에게 늘 돈을 꾸어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 치고는 매우 낙천적이다
다행히도 그는 극 말미에 일이 잘 풀려 빚을 갚으러 온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넘고 지나가야 할, 지나간 시절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 벚꽃동산.
그리고 그곳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고전이란,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깊이 동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오늘날 이 공연이, 관객에게 어떤 공감대를 불러 일으켜주는가.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보는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이다.
공연을 본 다음날부터 한 열흘을 꽉차게 바빴었다. 오랫만에.
이후로도 며칠간을 이러저러한 일로 피곤할 정도로 바빴다.
그래서 공연을 음미할 새도 없었고, 되새겨볼 틈도 없었다.
어젯밤, 다시 해야 할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 갑자기,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사실 관극을 하는 당시에는 그녀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었다.
집안의 돈이 바닥이 난 것도 모자라 집안의 상징인 벚꽃동산까지 넘어가게 된 마당에
비싼 식사를 하고, 돈을 꾸어주고, 파티를 열고,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모습이 답답해서 말이다.
그러나 문득, 그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의 밑바탕이 흐르는 의식은 무엇인가 싶었다.
로빠힌의 권유는 어쩌면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남이 보는 좋은 방법이, 그 방법을 내가 잘 수행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것이 개인의 운명, 팔자 같은 것이 아닐까)
그녀는 단지, 스스로도 안타깝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그녀만의 방법으로 그 순간을 넘긴 것일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마지막 파티. 사람들은 모두 그 집안의 마지막을 알고 있으면서도 파티를 즐긴다. 격렬하게!
어처구니 없게 볼 수도 있으나, 웬지 나는 거룩해 보였다.
마치 벚꽃동산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라고나 할까.
(심한 비유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수를 위해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를 보는 듯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경매의 결과를 기다리는 라녭스까야에게 분명한 종소리처럼 결과가 당도한다.
그녀는 집이 넘어가는 것보다도 누구에게 넘어가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나는 왜 그녀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일까...
어떤 두려운 결과를 앞두고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지금의 이 안정된 순간을 마지막까지 누리고 싶은 심정이랄까.
그래서 난 오히려 의연히 떠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에 위로를 받는다.
모든 걸 잃어도 다시 시작할 의지만 있다면 희망은 있다는.
어쩌면 체홉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관객으로서의 느낌은 오롯이 나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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