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꽤 여러 인물이지만, 실제 무대를 채우는 것은 오직 배우 셋.
소아성애자이자 연쇄살인범인 랄프와 딸 로나를 잃은 엄마 낸시,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
연극은 이들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해 필연적인 이유로 서로를 만나게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연극은 이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건을 재연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인물들은 의지할 데 없이 홀로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면해 사건을 재구성해가야만 한다.
그때 그곳에 있었던 누군가의 말을 복기하면서, 그 순간 그 자리의 공기를 다시 호흡하면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 속으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배우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
그래서 이 작품은 배우의 연극일 수밖에 없다.
오직 말로써,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들이 처한 상황과 심리적 정황의 퍼즐을 맞춰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를 대면하게 된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아그네샤는 극중 그의 연구에서 악이 저지른 범죄와 질병에서 기인한 범죄의 차이를 질문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그 중간지대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을까.
이 글에서 차마 다 밝힐 순 없지만, 연극은 마지막 대사 한 조각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물고 늘어진다.
그 부딪히는 말과 시선 사이에서 배우 박호산과 이석준, 우현주, 정수영이 열연한다.
그래서 이것은 연극이다
애써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이 내내 꼬리를 무는 것처럼, 무대 위에는 세 인물이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다.
테이블과 의자만이 놓인 빈 무대, 그들은 함께 있되 함께 있지 않으며, 같이 있고 싶지 않아도 같이 있어야만 한다.
김광보 연출은 초반 희곡의 구성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 작품의 연출 방향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각자의 얘기를 하다가 인물들이 만나게 되는데,
그게 일종의 낭독극처럼 느껴져서 책상과 의자를 두는 구조를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차피 이들이 하는 얘기가 자기 생각이나 기억에 대한 것이니
굳이 다른 인물들이 등퇴장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던 거다.
분명 독백이지만 인물들이 서로를 쳐다보거나 반응하도록 하면서 섬세한 결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조명과 음향 등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의 맥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그 맨 몸을 드러낸다.
이밖에 무대 뒤편에는 배우들이 사용할 각종 의상과 소품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관객들은 이야기의 플롯은 물론, 장면의 전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객석에 앉아 지켜볼 수 있다.
연극 <프로즌>은 무겁고도 무서운 작품이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극 앞에 우리를 불러 세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고문을 한다.
고문이란 것이 원체 그런 것 아니었던가. 애써 숨기고 있는 것을 억지로 실토하게 만들기 위해 고통을 가하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 연극은, 굳이 관객들을 고문해야만 했을까.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무대의 맨 얼굴을 샅샅이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고통 끝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슬픔과 분노 앞에 필요한 것은 어떤 용기인지,
인간이 인간을 용서한다는 것이 진정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이 연극의 존재 방식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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