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이십대로 돌아가겠느냐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딱 한 명만이 간다고 했습니다. 지금 20대가 40대가 된다면 달라지겠지만, 우리세대 대다수에게 20대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시대가 개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면 돌파했던 부류건 회피했던 부류건 돌아보면, 다들 상처로 남은 시대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20대는 또 이 시대만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선택이 비난된다거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소위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선택일 경우, 시대나 동료에게 부채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시대와 무관한 개인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시대의 책무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으나,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불행했던 시대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별로 돌아가고 싶지도, 회고하고 싶지도, 화제에 올리지도 않는 시절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시대는 힘들다고 말하겠지만, 6.25 이래로, 70년대와도 다르게, 시대적 공통과제 속에 놓였던 유일한 시대, 20대를 보낸 80년대는 그렇게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조숙한 고등학생 늦깎이 대학생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은 집도 가난했지만 제도 교육도 내게는 맞지 않았고, 성적도 중간 없이 극상 극하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래서 졸업하던 때 대학을 못 가고 군대를 다녀온 뒤, 남들보다 4,5년 뒤늦게 대학을 다녔습니다. 일찍 개화하셨던 아버님으로부터 함석헌, 유영모, 김재준 선생들의 얘기를 많이 들으며 자라다 보니 중,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의식이 높았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입시 공부하는 동안, 역사를 공부하신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다시 태어나도 이 길만을>류의 책들을 찾아 읽었고, 그런 이면으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여전히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대학에 가는 것이 사회의식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연장선상의 지적인 학문으로서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막상 들어간 역사학과의 분위기는 기대와 달랐으며, 학생들은 덜했지만 존경할만한 교수들은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대학 이후의 시간에는 보통의 80년대 학생들처럼 시대적 고민 속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며 보냈습니다. 오늘 몇 시 어디에서 모이고, 끝나고 나서 술 한잔 하고, 그런 일과가 일상이었습니다. 역사학과라 답사를 많이 다녔었지만 소위 사하촌파 이다 보니, 절에는 관심 없고 절 아래서 술 먹던 기억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학과에 충실하지는 못했으나, 나름대로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며 학생으로의 책무에도 소홀하지 않던, 양자를 병행하려던 부류로 살았습니다.
주(酒)류에서 비주류 독립학자로
지금의 나를 만든 8할이 무어냐 묻는다면, 스스로는 불확실한 미래에 서슴없이 모든 걸 던졌던 도전정신이라고 하겠고, 친구는 내 어머님의 새벽기도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선택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자기자신을 아는 데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리를 잡으면 어쩔 수 없이 구조화되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건 결국 불가능하게 되기에 내 목소리를 내보겠다고 자리를 잡은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독립된 길을 갈 수 밖에 없다고 방침을 정한 것입니다.
역사학계의 주류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더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 주류 역사학계가 식민사학의 잔재를 벗지 못했다고 보았고 둘째, 한국대학의 교수 충원 방식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셋째, 역사학의 주류가치관에 동의를 하거나 순응해야 그 범주에 편입되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르다고 생각되는 주류의 논리를 따를 수 없었으니 자연히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자유롭게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순응한다고 해서 편한 자리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건 뛰쳐나와 바라보니 학계와 일반대중과의 괴리가 너무 큰 것이 보고, 모든 학자가 대학교수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밥 세끼만 해결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목적 의식적으로 선택한 길이기에 박사학위를 받는 것과 동시에 학교와 학계를 떠나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구하자고 원서 한 번 낸 적 없이 지금 여기까지 지내 왔습니다.
내가 만든 직업, 역사평론가
책을 낸 이후 우연히 시사평론가라고 적힌 명함을 받아보고는 역사평론가라는 직함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평론가라는 직함은 내가 처음 만들어 쓴 셈입니다. 그렇게 미지의 길이었기 때문에 앞일에 대한 어떤 짐작도 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보다 과대평가되어 있는 경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작업들이 호응을 받고 있다면, 나 혼자만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이전에 나처럼 도전했으나 사장되어 빛을 보지 못했던 많은 시도들이 밑받침되어 가능했던 것이고 그들과 같이 도전하며 달리 살아서 빛을 보고 역사관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 점은 더더구나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식민 잔재적 역사관, 중화 사대적 역사관 청산의 문제, 편향된 역사관의 문제들에 맞서서 하나의 관점, 방향을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80년대 20대를 보내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을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합니다. 글을 씀으로써 자연히 문제의식에 대한 올바른 방향으로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지향하는 역사관이 일반대중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내가 지적하는 한국역사관의 문제들이 객관적으로 극복되는 때가 될 것이고, 그 때라면 나의 역할을 다한 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관점이 옳다라는 건, 우리 관점을 도그마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제적이라 말해지는 역사관에 대응해서 하나의 학설로서 상식적인 역사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런 학설의 중심에서 서기를 꿈꿉니다.
국사과목은 암기과목이 될 수가 없는 학문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사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면서 오늘날, 나와 우리를 있게 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암기 과목화 된 자체가 식민잔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즐겁게 공부하게 되는 날, 식민잔재의 사관을 극복한 상식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날일 것이라 예견합니다.
현세냐 후대냐 - 고진하면 감래할 것이니
인생 한 번 사는데 조금 더 편하다거나 조금 더 돈이 된다고 해서 그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은 지금도 하지 않습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을 다들 훌륭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겠냐고 한다면 아무도 그러겠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인생과 역사의 관계라는 것이 현세에서도 모든 걸 얻고 역사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인생이란 것은 없습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라도 한 가지를 지향한다면 현재의 달콤함을 얻기는 힘들겠지만 그가 남긴 성취로서 역사적인 호평을 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저는 라면 먹으나 한정식 먹으나 배를 채울 수 있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소소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고, 인생의 모든 길 속에는 더러움이 있는 법이므로 그 때 무엇이 옳은가 고민할 수는 있어도 그 길 자체를 회의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또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맛있는 것’을 먹을 처지가 된 것 같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제 경우에 그런 점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밥 세끼야 굶겠냐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길을 과감하게 도전하여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평론가에 길을 묻다
20대에는 기본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무엇을 목표로 하든 장미주단길 같은 건 없습니다만, 직업적 기본기와 인간생활의 기본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맺는 법-는 잘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것 다 챙기면서 관계에서 성공하기란 불가능한 법이고, 인생의 노상에 있는 더러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기본기를 잘 익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다른 표현으로 하드웨어의 용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건 미디어가 아니라 책과 얼마나 씨름하느냐 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드웨어가 넉넉해야 소프트웨어가 잘 구동되는 법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보면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걸었던 세 형제의 삶을 볼 수 있는데, 그 형제들이 힘들 때 잘나가던 사람들을 오늘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기억할 수 없습니다. 화려한 것만 쫓기보다는 화려함의 이면, 시간의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도 그 형제들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삶과 역사의 모습들이 담긴 책들을 많이 읽기를 권합니다.
편향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때이지만, 다른 측면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훈련을 쌓는 노력을 하면 좋겠습니다. 한쪽만을 바라보면 세상진리가 그 쪽에만 있는 것 같지만, 뒤돌아 다른 편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하게 다른 편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진국도 후진국도 다 다녀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명도 배워야 하고 문명 없이 사는 법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지에 가서 자연과 일대일로 맞닥뜨리는 체험을 통해 근원적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성찰하고 생에 대한 지평도 넓히시기 바랍니다.
언어는 세계화 시대의 기본도구입니다. 우리 때는 토플을 들고 다니면 이상하게 보던 시대여서 그렇게 못했습니다. 대의는 분명했으나 도구 부분에서 취약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다를 좋아해서 스킨스쿠버도 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도 꿈으로만 남았습니다
지금은 취직이 어려우니까 다르게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가 볼 때는 행복한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틀린 건 없으며, 남과 다를 뿐이니 아무리 엉뚱해도 자기만의 다른 점을 잘 살려서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질은 낮지만 세계각국을 여행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미래를 낙관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 못하는 게 우리사회의 문제점인데, 경제사회적 지표 이상을 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식민국에 최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피식민국은 세상에 피식민 경험을 가진 100여 개 나라들 중 한국뿐입니다. 한국은 경제적 성취와 민주주의를 자력으로 달성한 자랑할만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사는 젊은이들은 세계최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온고지신-옛 것을 통찰하여 새 역사를
인생의 장애물에 대처하는 방식으로는 포기하거나 우회하거나 돌파하는 것이 있을 텐데, 돌파를 시도한다고 해도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돌파를 시도한 후에라야 처절한 좌절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믿게 되며, 도움을 얻을 수 있기에 실패에서 배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순신도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세계해전사에 남을 위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통찰이 중요합니다. 통찰이라는 것은 정치지도자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며, 그 정치지도자를 배출하는 정당에게도, 선택하는 국민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역사, 사회 속에서 좌표를 설정하고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개인도 사회도 새로운 다른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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