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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정보/잃어버린 얼굴 1895

잃어버린 얼굴 1895 - 작품을 보기 전에 기억해 두어야 할 역사적 사건들

by lucill-oz 2013.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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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고종 19) 6월 9일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

 

배경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발단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樂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경과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민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결과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천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고종21) 개화당(開化黨)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

 

역사적 배경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은 개항 후 세력을 증대시키면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여러 가지 자주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1882년 7월 임오군란으로 인해 커다란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비 정권이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민비 수구파는 청국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청국은 한림원학사 장패륜(張佩綸)의 ‘동정선후육책(東征善後六策)’이라는 건의안을 채택하여 이 기회에 군대를 파견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청국은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주둔시키고, 집권자이며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청국 군함에 초청하여 놓고는 청국으로 납치하여 보정부(保定府)에 유폐하였다.

청국은 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민비 정권을 다시 수립하였지만 청군을 철수시키지 아니하며 채, 무력을 배경으로 허구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조선속방화를 위한 적극간섭정책을 자행하고 조선의 자주 독립권을 크게 침해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과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병권을 장악하고, 재정 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陳樹棠)은 재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홍장이 파견한 묄렌도르프(Mӧllendorff, P.G.)는 해관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외교권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침해했는가는 다음의 몇 가지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청국은 임오군란 진압 직후인 1882년 음력 8월 28일 민비 정권에게 압력을 가하여 가장 불평등하고 많은 특권을 허용하도록 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전문(前文)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써넣었다.

심지어 재정 고문 진수당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공공연히 남대문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또한, 청국은 조선 정부에 대하여 “무릇 외교에 관한 일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으며, 청장 오장경은 고종을 면전에서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행패도 극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국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의 개화 정책과 개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 보고 온갖 방법으로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 운동을 저지하였다. 그 결과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민비수구파는 임오군란에 의해 정권이 한번 붕괴되었다가 청국의 구원으로 재집권하게 되자, 청국의 조선속방화정책에 순응하여 나라의 독립이 크게 침해되고 자주 근대화가 저지되는 것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결국 갑신정변의 원인은 청국의 조선 자주독립의 침해와 조선 개화당의 자주근대화정책에 대한 청국 및 민비 수구파의 저지와 탄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당은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과 개화 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단호하게 무장 정변의 방법으로 대항해서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달성하려 한 것이다.

1882∼84년경 조선의 사회정치세력은 ① 급진개화파(개화당) ② 온건개화파 ③ 민비수구파 ④ 대원군수구파 ⑤ 위정척사파 등 5대 세력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5대 세력 중에서 ①급진개화파가 ③청국과 결탁한 민비수구파에 대항하여 일으킨 정치투쟁이었다.

 

경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첫째, 박영효(朴泳孝)는 1883년 3월 한성판윤에서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자, 그 곳에서 약 500명의 장정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둘째, 윤웅렬(尹雄烈)은 1883년 1월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로 있으면서 북청(北靑) 지역의 장정 약 500명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로 양성하였다.

셋째, 김옥균 등이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 생도들이 1884년 7월 귀국하여 갑신정변의 중요한 지휘 무력이 되었다.

넷째, 김옥균은 정변을 준비하기 위해 43명으로 이뤄진 비밀무장조직 충의계(忠義契)를 만들어 신복모(申福模)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개화당은 이와 같이 약 1,000명의 정변 무력을 양성하였다.

1884년 봄부터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청국은 1884년 5월 23일경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 중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서울에는 1,500명 청군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 1884년 8월 발발한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푸젠함대(福建艦隊)를 격파하는 등 전쟁 상황이 청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옥균 등 개화당은 정변을 일으킬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1884년 9월(음력 8월) 정변을 단행한 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청국이 안남전선에 묶이어 조선에서 대규모 군사 행동으로 전선 두개를 만들 여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김옥균 등 개화당의 정변 결정이 전적으로 개화당의 독자적 결정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개화당의 독자적인 계획 하에 정변을 단행하기 위한 결정이 내려져 본격적인 준비가 진행되는 시기에 본국에 갔다 1884년 10월 30일 서울로 돌아 온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는 종전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당은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측의 호의에 응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으로부터 공사관 병력 150명과 일화 3백만 엔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개화당은 일본군의 소임에 대해서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비만을 분담하고, 국내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이것은 오직 개화당이 맡을 것을 요구하여 일본측의 동의를 얻었다.

개화당은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윤태준·이조연(李祖淵) 등과 민비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개화당의 배신자인 환관 유재현(柳在賢)도 처단하였다.

개화당은 뒤이어 곧 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여러 단계의 인사 발령이 있었으나, 최종적인 신 정부의 각료는 영의정 이재원(李載元 : 국왕의 종형),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前後營使兼左捕將) 박영효, 좌우영사 겸 대리외무독판(左右營使兼代理外務督辦) 및 우포장(右捕將) 서광범(徐光範), 좌찬성 겸 우참찬(左贊成兼右參贊) 이재면(李載冕 : 대원군의 嗣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신기선(申箕善), 예조판서 김윤식(金允植), 병조판서 이재완(李載完 : 이재원의 아우), 형조판서 윤웅렬, 공조판서 홍순형(洪淳馨 : 왕대비의 조카), 호조 참판 김옥균, 병조 참판 겸 정령관(兵曹參判兼正領官)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朴泳敎) 등이었다.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신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2월 5일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개화당은 동시에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영사 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치하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 측은 12월 5일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민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민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하자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었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민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또한 민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개화당의 국왕에 대한 호위는 경우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왕을 중심에 넣고, 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②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③ 외위(外衛)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약 1,00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너무 넓어 개화당은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에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정변을 일으켜 신 정부를 수립한 개화당은 그들의 새로운 개혁 정치의 지침인 혁신 정강을 제정, 공포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고종이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12월 5일 저녁에 승정원을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설치하고, 김옥균의 주도하에 좌의정 이재원, 우의정 홍영식,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병조판서 이재완, 좌우영사 박영효, 호조참판 김옥균, 도승지 박영교 등 신 정부의 주요 대신급들이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여기서 결의된 것을 우승지 신기선으로 하여금 청서하게 하여 홍영식이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12월 5일 저녁부터 12월 6일 새벽까지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협의되어,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 형식(傳敎形式)으로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요소에 게시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 고종이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혁신 정강의 조항은 상당히 많아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 개 조항에 달했다고 하나, 현재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의 ≪갑신일록 甲申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14개 조항이다.

①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를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그 중에서 재능 있는 자가 있으면 등용할 것 ⑤ 그 동안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에서 심한 자는 처벌할 것.

⑥ 각 도의 환상제도(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 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 순사제도(巡査制度)를 시급히 실시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그 동안 유배, 금고(禁錮)된 사람들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⑪ 4영(營)을 합하여 1영을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近衛隊)를 시급히 설치할 것.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 관청은 폐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합문(閤門) 안의 의정소(議政所)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뒤에 왕에게 품한 다음 정령(政令)을 공포하여 정사를 집행할 것, ⑭ 정부는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할 것 등이다.

갑신정변의 혁신정강 14개조는 당시 개화당 신 정부의 개혁 정치의 의지와 기본 내용을 집약적으로 공포한 것이었다.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에 청군은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 군이 용감히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철병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정면에 부딪힌 1500명의 청군을 도저히 대항할 수 없어 갑신정변은 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함으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비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는, ① 청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범과 군사적 공격 ② 개화당의 일본군 차병(借兵)의 실책과 일본군의 배신적 철병 ③ 개화 정책을 지지할 사회계층으로서의 시민층의 미성숙 ④ 민중의 지지 결여 ⑤ 개화당의 민비와 청군의 연락에 대한 감시의 소홀과 정변 수행 기술의 미숙 등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근대 한국의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첫째, 세계사적으로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정열적으로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첫 번째의 가장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

둘째,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주었다. 갑신정변이 추구한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 문화와 자주적 근대 국방의 건설은 그 뒤 모든 개화 운동과 민족운동이 계승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 민족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기원을 만들어 주었다. 갑신정변의 독립운동은 당시 중국의 조선속방화정책에 대한 과감한 저항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지만 이 운동의 내부 성격은 모든 외세의 자주권 침해와 침략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추구가 본질을 이루고 있었다.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제1장을 ‘갑신독립당의 혁명실패’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넷째,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그 뒤의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반성한 위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사건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내용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비인 민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왜곡했기때문이다. 미우라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는가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자국의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정부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범죄에 관련된 일본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기꾸치 겐죠(菊池謙讓),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는 후일의 저작(≪대원군≫, ≪조선근대사≫, ≪민후조락사건≫, ≪조선잡기≫ 등)을 통해 대원군과 왕후의 갈등구도로 한국근대사를 날조하였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술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일반에게는 이 사건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본측 연구자들은 미우라가 단독으로 계획하여 자행한 것으로 그 이상의 배후는 없으며 조선측에서도 대원군이 적극 협조하였다는 입장이다.

즉 민왕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사건 현장의 지휘구도에 대해서도 일본군 장교 대신 낭인배의 역할이 중심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이 이 음모와 무관함은 재일사학자 박종근(朴宗根)이 이미 일본측 자료의 정밀한 추적을 통해 밝혀 놓은 바 있고, 사건의 주요 무력 기반이 일본군이었음도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였던 야마베 겐따로(山邊健太郞)가 밝혀 놓았다.

남은 의문은 사건에 대원군이 관여했는가, 혹은 일본 정규군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배후구도는 어떠하며, 일본측이 민왕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정부가 여타의 수단을 배제한 채 그토록 야만적인 수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측 연구자들은 일본정부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다. 대원군의 요청에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선선히 응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조선군 훈련대의 거사에 일본군이 요청을 받아 지원을 해 주었다는 논리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정부의 지시도 없이 그와 같은 범죄를 독단적으로 계획하고 자행하였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에서 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목표는 서세동점의 위기를 타개하고 자국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취지하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1890년대초에 드러나고 있었다. 수상 야마가타(山縣有朋)는 그의 의견서(1890.3)에서 ‘일본의 이익선의 촛점은 실로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 살얼음을 딛는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880∼1890년대에 걸쳐 일본이 군비확충에 박차를 가한 것이나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조선과 만주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일본이 광개토왕능비문의 탁본을 입수하여 비문 날조를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농민봉기는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본에게 적절히 이용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관조약(1895.4.17)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는 대신,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행태에 제동을 건 몇몇 나라가 있었다. 가장 민감한 대응을 보인 쪽은 러시아였다.

청일전쟁 초기 관망하던 러시아는 전장(戰場)이 만주로 확대되자, 일본의 목표가 자국의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향해져 있음을 깨닫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어 강화조약에 요동반도의 할양이 명시되었음을 확인하자,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불·독을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4.23)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引俄拒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ber : 韋貝)였지만, 조선측의 핵심 인물은 민왕후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베베르는 영·미·불 등 열국공사와 함께 이노우에를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독주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왕후는 이노우에의 행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는데, 때문에 이노우에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장벽에 부딪쳤다.

이후 일본에서는 요동반도 환부와 조선문제의 처리를 놓고 비상이 걸렸다. 내각회의가 거듭되었고(6.4), 이노우에도 본국에 휴가를 요청하여 귀국하였다(6.7, 서울 출발. 6.20, 요코하마 도착).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1)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추천하고, (2) 내각회의에서 500(후에 300)만엔을 조선에 제공할 것을 건의하였다(7.10∼7.11).

그런데 일본정부가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측 당로자들의 주장은 모호하다. 이토(≪伊藤博文傳≫)는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라 하였다.

반면에 이노우에(≪世外井上公傳≫)는 미우라의 파견은 이토가 결정한 일이라 하였으며, 미우라 자신은 이토와 이노우에가 자신을 한국으로 밀어내듯 쫓아보냈다(≪觀樹將軍回顧錄≫)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사태에 대해 이토는, “만일 종래처럼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러시아의 방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중단한다면 일청전쟁은 전혀 그 의의를 상실하는 동시에 도리어 러시아에게 한국을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허용할 우려가 있어 난처하다”(≪이등박문전≫)고 하였다.

사진기까지 휴대하고 왕후시해의 현장에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 기자 고바야카와도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서 보거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춰 본다면, 또한 동양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니 ……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한러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에 민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베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해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한국의 정치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있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민후조락사건≫).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당면한 내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향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조선의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미리 쐐기를 박자는 정략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 일본에 대한 저항의욕을 봉쇄하려는 심리전적 조치이기도 했다.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가 떠밀다시피 하여 주한공사로 파견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일본의 내각회의에 참석한 뒤, 7월 하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전환,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왕후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이노우에는 후임자인 미우라가 부임(공식임명 : 8.17, 서울도착 : 9.1)하였지만, 업무인계를 핑계로 17일간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가 서울을 떠난 것은 9월 17일, 인천에서 4일간 더 머물다가 일본으로 향했으니,(9.21) 왕후를 시해하기 불과 17일전이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서울에서는 왕후제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 공사관 서기)·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 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 : 포병중좌) 등이 왕후시해의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조선정부의 일본인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경찰, 낭인배 등을 고루 동원하였다. 만일의 경우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왕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교관은 일본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일본측 자료는 5시 45분으로, 약 한시간 오차).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 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복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장교(2명)가 이를 보조하였다.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왕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나갔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 초초하게 사태의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하였다(6시경). 그러나 즉시 그는 사태의 은폐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고종을 핍박하여,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왕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서명도 없는 날조된 조칙이었다. 이어 그는 사건을 조선군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들인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사실여부를 규명해 달라는 위장된 내용의 문서를 외부에 보내, 조선측 스스로가 일본군민의 가담을 부인하는 희한한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일부터 서양외교관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당시 만행이 왕태자·다이·사바틴(다이의 보조역)·현흥택·의녀(醫女)·궁녀·궁중하인 등에 의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목격되었고, 열국 외교관들도 이를 간접적으로 접하였기 때문이다. 알렌(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입궐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여 산만한 복장의 칼찬 일인들이 광화문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고종과 미우라가 있었다.

당시 미우라는 고종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렌 등이 직간접으로 접한 현장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일본군·영사경찰·공사관원·낭인배 등이 왕후시해를 자행하였음과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알렌·힐리어(Walter C. Hillier :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코커릴 등에 의해 사건이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초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 군민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후의 ‘중세적’ 정권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병하였다. 그러나 열국 여론의 비난을 받은 일본정부는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천명하였다.

이어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사태 호도에 나섰다. 아울러 미우라와 스기무라 이하 약 50인에게 퇴한명령(10.18)을 내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하였다.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뒤 조선에서 돌발한 춘생문사건(11.28)이 일본측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웨베르·알렌 및 이범진·이완용 등 조선의 친미·친로파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자 한 사건이다.

그런데 일본정부와 언론은 이 사건에 주한열국외교관들이 관계되었다고 선전하며, 다른 열강들도 조선내정에 개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조를 펴면서, 그들의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을미사변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판은 잠시뿐, 각국 정부의 반응은 정반대의 기류를 타고 있었다.

영·미·러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지시하였다. 이토오 이하 일본정부의 인물 및 각국주재 일본외교관의 다양한 사태무마책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서양 외교관들은 이 사건에 미우라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밝혔으나 더 이상의 배후는 추구하지 못하였다.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96년초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초명)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나,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총살한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을미사변은 일본이 한국에 행한 만행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오고 있다.

 

 

 

아관파천 [俄館播遷]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 있던 민비(閔妃)의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貞洞派)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K.I.) 역시 미국 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민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의 실시를 권유하였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 후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매수 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민비 세력과 친미·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였다.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였다.

또한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모 시해로 인해 고조되었던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초래하였다.

 

경과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를 이용하여 의병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기대에 못미치자,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측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이윤용(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결과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해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 대신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 되어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이윤용·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안경수(安駉壽)·권재형(權在衡)·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고영희(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국적(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 23부(府)였던 지방 제도를 한성부(漢城府)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으로 대신 초청하였으며,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 대결이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협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해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상대리 사이온지(四園寺公望)와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안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4일자로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小村壽太郎)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측에 유리한 내용이었다.

그 뒤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하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부터 6월 9일까지 진행된 비밀 회담을 통해 양국 대표는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 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 조관과 2개조의 비밀 조관으로 구성된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9도선 국토 분할안을 취소하는 대신, 향후 필요한 경우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 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Alexiev,K.)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민영환(閔泳煥)비밀회담에서 러시아측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에게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 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하고,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의의와 평가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국왕의 무능·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 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왕실과 보수 집권 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자주권 수호는 이후 좌절되고 말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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