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새없이 몰아치는 여자의 대사와 그런 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남자.
문제의 발단이 무엇이 되었든,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갈등이든,
남자와 여자의 입장차이는 천길처럼 멀기만 하다.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채 주고 미리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여자와
여자가 핵심을 꼭 짚어서 구체적으로 요구해 준다면 그까짓 거 못 들어줄 게 없을텐데
언제나 여자의 스무고개에 작아지다가 벌컥 화가 나 오히려 여자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되는 남자.
내가 어디 있든 나를 찾아주길 원하는 여자와
너에게 간절히 가고 싶지만 네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잘 모르겠는 남자.
아이를 갖는 문제로부터 촉발된 둘 사이의 갈등은 서로의 입장을 좁히기가 쉽지 않다.
여자가 지구환경을 들먹이며 내가 굳이 아이를 낳아 이 지구에 해가 될 요인을 하나 더 만들어야겠냐고 말하지만
실은 그건, 아직 엄마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여자가
앞으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자기에게 닥칠 몸과 마음, 생활의 변화를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나 자신은 없어지고 오로지 아이의 엄마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여자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름 실천적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지구환경'이라는 거대 주제를 연구하는, 즉 학문을 하는 식자다.
그런 그녀에게 출산은, 자신이 지켜야 할 지구에 이산화탄소를 보태주는 학문적 이율배반 행위이며
또한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아온 시간을 아이와 함께 나누어 써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 스스로에게도 역시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남자의 사고는 단순하고 현실적이다.
아니, 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 도움이 된다고 그래...
혹시 그 애가 니가 고민하고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더 열심히, 더 많이 힘을 보태면 되지 않을까 라고 설득하려고 하지만
여자의 그 거창하고 허황된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긴 어렵다.
아니, 여자가 저토록 흥분하는 이유를 남자는 잘 모른다. 여자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사실, 내가 봐도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니, 저러면 남자랑 대화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여자가 자신에게 닥친 일생일대의 변화를 몸으로 감당해 내야 한다는 본능적인 인식이 되면서
심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거부반응이었을 것이다.
그걸 남자가 또 알 턱이 있겠는가, 여자도 자기의 이 변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모르고 쩔쩔 매고 있는데...
남자는 여자를 진정시키고 싶고, 진정 이해하고는 싶다.
그래서 답답하다. 보는 입장에선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착하기만 한 것 같던 이 남자는 여자와의 갈등에 대한 위로를 밖에서 받으려 했고 (반전!)
이들은 이제 적나라하게 싸운다.
이 편이 더 낫다. 차라리. 추상적인 표현 말고 구체적으로 따지라고!
암튼 결론은 급 반전되어 그들은 서로 나란히 함께 가기로 한다. 끝까지.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그 생리적 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걸까,
아니면 임신과 출산이라는 그 역할의 차이에서 오는 걸까.
여인들의 사회진출이 더이상 특별하지 않은 지금도 이 근본적 문제는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예전엔 특별한(많이 배운)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했는데
요즘엔 특별한(돈많은 집) 여자들이 전업주부를 할 수 있는 세상이구나...
우리가 일하는 서양 여자들을 부러워 할 때 그녀들은
한국의 대부분의 기혼여성들이 전업주부라는 걸 그렇게 부러워 했다더니만...ㅎ
남녀간의 갈등의 소재를 지구환경이라는 엄청난 이야기를 갖고 온 덕에,
그리고 여자의 "난 에펠탑을 낳는 거라구!" 라는 대사가 '헉!'하게 만들었다. 아, 그렇군... 그렇겠군...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너무나 재밌게 본 덕에 여자는 곽선영 배우,
진지한 남자 역은 역시 성두섭이지.
단조로운 무대에서 아무런 장치의 변화도 없이 한시간 반을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는 듯 엄청난 대사량을 아주 빠른 속도로 쉴 새 없이 쏟아내야 하는 두 배우들에게
작품의 무게가 오롯이 실린 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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