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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연극

무죽 페스티발 "적의 화장법" - 20190312

by lucill-oz 2019.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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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죽을란다" 라는 다소 비장한 이름의, 여러 극단의 연작 시리즈 중 극단 신인류의 첫번째 작품.

<적의 화장법>이라는 강렬한 제목에 이끌렸다.

 

       

 

 

 

처음 가 본 극장 동국. 

성대 쪽의 소극장들이 많이 그러하지만... 나오면서 웬지... 

내가 돈 많이 벌면 번듯한 극장 하나 지어서 연극인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석 안되는 작은 극장인데 그래도 단차가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심플한, 그러나 충분한 무대.

특별한 사건도 없고 장소의 변화도 없이 두 남자의 긴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극이다.

 

 

비행기 연착으로 몇 시간을 맥없이 기다리게 된 제롬 앙귀스트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방해하는 정장차림의 남자 텍스트로 텍셀.

앙귀스트는 그를 귀찮아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가진 않는다.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에게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게 된 앙귀스트.

 

그렇게 시작된 텍셀의 이야기.

그가 8살 때 모든 아이들이 선망하던 친구를 질투하여 그 아이가 죽도록 기도했더니 

그 다음날 정말로 그 아이가 죽었단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 아이를 죽인 거라고.

여기까진 남자가 과대망상이거나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죄의식은 누적되지 않는다. 

그렇다. 모든 악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신앙을 포기하게 된 이유를 말한다.

사료에 비린내 나는 생선살을 섞어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역겨운 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어느 날 그 고양이 밥을 먹게 되었는데 의외로 맛있더라고.

그런데 그 고양이 밥을 먹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이었고

그 적의 힘은 하느님의 힘보다 더 커서 신의 존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빼앗아 버렸단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설득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젊은 시절, 공원묘지에서 한눈에 반한 아름다운 여인을 강간했단다.

그러나 이후로도 오로지 그 한 여인만을 사랑했으므로 자신은 정조관념이 투철한 강간범이란다.

강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나 말투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즐거워보인다. 이 사내가 엽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난 그녀에게 접근, 남편의 친구로 착각한 그녀의 초대로 집까지 방문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비로소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어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칼을 쥐어준 텍셀.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나에게 복수를 하라고. 

그 칼로 자기를 찔러 직접 복수하라고. 복수의 기회를 남에게 미루지 말라고.

그녀에 대한 순정을 고백하며 이름을 알려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아니 입을 열 수 조차 없는 그녀를 결국은 그가 죽이고 만다. 

의도치 않은 완전범죄가 이루어졌고, 다음날 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단다. 이사벨.

 

그 때 갑자기 흥분하는 앙귀스트, 이사벨은 바로 십년 전에 피살당해 죽은 앙귀스트의 아내였던 것.

물론 법은 개인에게 복수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 일이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감정이 많이 식은 상태라 하더라도

눈앞에 아내를 죽인 범인이 태연히 범행을 자백하는데 앙귀스트는 태도는 뜻밖에 냉정하다.

사람의 감정이라는게 그렇게 철저히 이성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가. 

더구나, 남의 일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데 말이다.

텍셀은 앙귀스트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려고, 그의 손에 응징을 받고 싶어서 그에게 모든 얘기를 했는데도 

앙귀스트는 그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텍스트로 텍셀은 소리친다.

 

당신 손에 죽고 싶은 이 마음은 나의 죄의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앙귀스트는 그저 텍셀이 미친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텍셀의 멱살을 잡고 목을 조르거나 주먹을 날리는 대신 경찰을 부른다.

그러나 경찰의 눈엔 텍셀이 보이지 않는 듯.

그러자 갑자기 무례하게 반말을 하기 시작하는 텍셀.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앙귀스트를 쳐다본다.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텍셀. 그는 바로 앙귀스트의 내면 안에 숨어 살던 악마적 존재.

텍셀은 내가 곧 너이며, 네가 아내 이사벨을 죽였다고 말한다.

앙귀스트는 강하게 부정하며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노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텍셀은 그날을 정확히 묘사한다.

그 날, 아내가 죽던 그 날, 텍셀의 모습으로 아내에게 나타난 앙귀스트.

자신의 욕망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기분이 상한 그가 아내를 죽인 거라고...

 

아마도 그녀는 비록 공포스럽게 시작된 인연이긴 하지만 

이후로 지고지순했던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그 순간 그의 모습은, 처음 만난 날 그 공원묘지에서 그를 강간할 때의 그 모습이었으리라.

다시 살아난 공포심으로 얼어붙은 그녀에게 그는 그날의 복수를 하라고 윽박지르며 그녀에게 칼을 쥐어준 것일까.

그토록 집요하게 그녀의 이름을 물었던 이유는 혹시

자신을 낯선 사람 대하듯 하는 그녀에게서 자신이 온전히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까.

 

피가 묻은 그 칼을 사무실 책상에 숨기고 태연하게 십년을 살아 온 거란다.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던 그 둘은 결국 한 사람의 두 모습이었던 것.

 

왜였을까? 그 존재는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나타난 것일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

그러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피할 곳 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는 공항 대합실이라는 그 장소.

그렇게 무형의 감옥같이 제한된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득 떠오른 아내의 기일.

그 기억의 틈을 비집고, 뒤늦은 양심 혹은 죄의식이라도 든 것이었을까?

 

텍셀은 앙귀스트를 비웃으며 그를 괴롭히고 앙귀스트는 딜레마에 빠진다.

진실을 알고 있는 텍셀을 죽이고 앙귀스트는 자유롭게 살 것인가.

텍셀의 존재를 의식하며 평생 불안해 하며 살 것인가.

나는 결코 네가 아니라는 듯, 마치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려는 듯 앙귀스트는 처절하게 끝까지 존댓말을 한다.

그러나 앙귀스트는 결국 텍셀의 머리를 벽에 처박아 죽이고 마는데...

 

다음날, 뉴스에서는 공항 대합실에서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한 한 승객의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

 

 

 

 

인간의 이중성.

이 연극은 관객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또한번 타자화시켜 보여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자주 자신을 속이며 사는가.

타인에게는 양심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면서 자신에게는 너무 너그럽지 않은가.

아니, 그에 지나쳐 자신의 치부는 아예 없는 기억으로 지우고 살지 않는가.

그래서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내 모습조차도 스스로는 타자화시켜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버리지 않는가.

우리는 그런 예를 너무나 많이 보며 산다.

 

그런 예가 내 안에는 없으랴.

나도 잊고 싶어서 내 기억에서 스스로 지워버린, 그래서 실제와 기억이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는 일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렇게 왜곡된 기억은 진실의 모습으로 뇌리에 자리잡고.

그런 일들이 내 안에는 없으랴.

 

 

결말을 알고 나서 앞의 대사들을 반추해보면 텍셀의 대사들은 결국 

제롬 앙귀스트의 내면에서 독백처럼 튀어나오는 그의 무의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 공격하고 한쪽에서는 무시하는 척하며 방어하고. 

평소엔 가면과 같은 화장술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면의 악을 무시하려고 애쓰다가

어느 순간 내면의 방어기재가 약화되었 때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내부의 적에게 결국엔 잡아먹히고 마는.

 

벨기에 출신의 아멜리 노통브( Amelie Nothomb) 원작.

이런 주제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기막힌 반전까지 선물하는 구성이라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른 책에도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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