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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My Story

옛날엔 그랬는데...

by lucill-oz 201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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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 업무 미팅이 있었다.

몇해 전부터 협력관계로 일을 하게 된 건설사의 K사장님, 그리고 그분을 연결시켜준 고마운 H선배와 함께였다.

오래~된 호텔건물을 리노베이션 하는 일이라 호텔측에서 보관하던 건축도면을 가져왔는데 수작업으로 그린 청사진이었다.

A1 크기의, 평철도 아니고 예쁘게 반첩 제본한 상태로 표지가 너덜거리는...

CAD DATA가 없는 관계로 그걸 보고 다시 작업을 해야하는 상황이라 복사를 하기로 했다.

우선 급한 몇장을 복사기에 대고 몇번에 나누어 복사를 하다보니 약한 부분이 찢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대형 복사집에 맡기기로 하고 찢어진 청사진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떨어지거나 찢어진 부분은 딱풀로 붙이고,

트레이싱용 테이프를 짧게 끊어서 중간 중간 고정을 한 후 길게 잘라서 한번에 붙여주는 그 꼼꼼한 손길들이란.^^

오십대(!)의 우리 세 사람은 정말 오랫만에 보는 청사진을 만난 반가움과 

그걸 보수하는 과정을 즐기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거, 왕년에 질리도록 많이 해 봤던 일 아니야~ 그러면서. 그땐 그랬지... 뭐 그러면서^^

노트북이 있어도 무선 인터넷을 연결하지 못해서 데스크 탑을 찾아가고

스마트폰 뱅킹까지는 진도가 못 나가서 겨우 인터넷 뱅킹까지밖에 누리지 못하는 중년들이...^^

옆에서 지켜보던 좀 젊은 공무과장은 '아니 저걸 그냥 사진 찍어서 보면 되지 왜 저런 짓을?'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관공서 근처마다 대형 출력물을 취급하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우리 노인네(!)들은

이십대 중반의 막내 사원을 시켜 복사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반책 제본을 모두 뜯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거, 뜯다가 다 망가질텐데... 안돼!

아니야, 안뜯고 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구~ 옛날에는 다 했었는데 왜 안돼? 딴 데 알아봐!


사무실에 있던 직원은 근방의 몇 군데를 다 알아봤지만 같은 대답이었다.

급기야는 인터넷을 뒤져 좀 먼 도시까지 알아봤으나 답은 같았다.

나도 내가 다니던 출력소에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 시청 근처에 위치한 곳이라 대형 도면을 많이 만지는 곳이다.

그랬더니... 옛날엔 있었죠, 한 십년 전까지는... 그런데 이젠 기계가 단종되었구요, 수요도 없고 하니까...

결국은 기계에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얘기였다.

우리결국, 그걸 CAD DATA로 만드는 일을 설계 사무소 쪽으로 슬며시 넘기기로 하였다.

어차피 거기서도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기계의 세대교체를 경험하고, 

아울러 우리도 이미 기계처럼 교체된 세대가 되지 않으려면 정말 부지런히 따라 잡아야겠구나...하고 느끼며 

다음 행선지에 도착했다. 설계사무소.

외출 중인 소장님을 기다리며 회의실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업무 분위기다.

프로젝트 별로 구분하여 죽 나열해 놓은 매우 많은 파일들. 

맞다, 프로젝트 별로 구분해서 정리한 파일들! 옛날엔 나도 그랬는데...

벽에는 웬지 칠십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오늘이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웬지 깐깐할 것 같은, 반백의, 예술가 필의 그 소장님의 이미지가 그대로 읽혀진다.^^


순간, 내 책상은 분위기가 어떤가?

언제부터인가 내 책상에서는 종이파일들이 점점 줄어간다. 나만 그런건 아닐 테지만...

그리고 벽에는 쓰릴미와 구텐버그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얼마 전에 책꽂이 가득 꽂혀있던 연극, 뮤지컬 프로그램 북들을 치웠길래 망정이지 

누가 보면 무슨 공연관계 업무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아마도 내 분위기는,아니 내 위치는...

내 나이만큼이거나 그보다 아주 조금 젊은 쪽이 아닐까 싶다.^^




손녀딸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 하시는 엄마를 위해, 그리고 할머니를 무척 좋아하는 딸을 위해 

엄마 댁에서 하룻밤을 지낸 딸을 데리러 안양으로 갔다.

마침 저녁을 들고 계셨는데, 급하게 김을 재는 바람에 짜게 됐다고 걱정을 하신다.

아니, 요즘 누가 김을 직접 재서 먹는다고...;

그래도 옛날 방식을 고집하시는 팔십대의 우리 엄마, 딸 먹으라고 한봉지를 이미 싸 놓으셨다.


밥을 먹다가 내 머리가 앞으로 쏟아져 밥그릇에 닿았었나보다.

엄마는 밥먹을 때는 머리를 좀 뒤로 묶고 먹으라며 "옛날엔 도마핀으로 이렇~게 꽂으면 이쁘고 좋았는데..."하신다.

도마핀, 그게 뭐냐면 그냥 일자로 길~게 생긴 머리핀이다.

요즘엔 장식을 붙여 주로 반묶음 할 때 많이 쓰는데, 엄마는 또 옛날 생각이 나신 모양이다.


여든하고도 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우리 엄마는 정말 깔끔하시다.

음식을 만질 때의 그 정갈한 손길이라든가, 뭘 한가지를 만들더라도 입맛에 맞게, 혹은 몸에 맞게 만들고

만일 맘에 들지 않는 무언가가 생기면 그걸 어떻게 해서라도 맘에 들게 고치신다.

당신이 그러하시니... 딸의 하는 양이 성에 차지 않아 하신다.

나도 뭐든 하면 못한다는 소린 안 듣는데... 엄마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딸 나이도 어느덧 오십이 되었건만(헉!), 니 나이야 어찌되었건 내 말을 들어라~ 하신다.

(우리 엄마의 그 끊임없는 잔소리. 이제 자식들도 손주들도 다 컷으니 그런 소리 하지 마시라고,

그러면 애들이 싫어한다고 그래도... 뭐 사실 그거라도 안하시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나...)

어쨋든, 저녁을 먹고 나는 설겆이를 하고 엄마는 옆에서  싱크대랑 가스렌지에 떨어진 소금을 닦아내시는데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손길에 엄마의 팔십여년 내공이 담겨있음을 느낀다.

우리 엄마에게는 난 아직도 새카맣게 멀리 떨어진 햇병아리임에 틀림없다.

하긴 아직까지 김치도 제대로 한 번 못 담가 보았으니 뭐,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나는 언제나 음식 만드는 것만 빼면 나는 뭐든 잘 한다고 큰소리 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대도 바뀌지만

내가 그 한 가운데에서 벗어난다고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면, 그 세월만큼의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뿐이겠는가, 생각이 크고 넓어지는 만큼 보이는 것도 느끼는 것도 달라지니까.

진실도, 진리도, 삶의 지혜를 깨달을 줄도 알게 되니까.

어렸을 때는 이십대나 삼십대만이 최고의 시절을 구가하는 것인 줄 알았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삼십대, 사십대를 지나보니 

누군가의 삶이 차츰 형태가 잡히고 색이 입혀지는 것이 느껴지는 게 참 괜찮다 싶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색의 사람으로 보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또한, 사춘기가, 질풍노도의 시기가 꼭 십대 시절에만 오는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사십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제 2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것 같다.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보며, 잘 살아가고 있는건지, 혹시 아닌 길로 접어든 건 아닌지,

앞으로의 길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 

출발점을 통과했다고 해서 누구나 목표한 길에 곧바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생각이 깊어지는 나이인 것 같다, 가을처럼. 


오늘, 폭설 속에서 길었던 일정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다녀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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