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얘 때문에 커피가 더 늘었다.
아무데서나 팔지도 않는,
그래서 만나면 매우 반가운,
떨어질까봐 은근 신경쓰이는...
그래서 어제 50개짜리 두봉지나 사재기를 해 두었다.ㅎㅎ
뿌듯해!
베트남인들은 지난 천 년간 강대국으로부터 수많은 외침을 받았지만 네 차례에 걸쳐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외세 침략 격퇴의 네 번 역사는 1284년 몽골과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진출한 무적의 쿠빌라이 제국 군대는 인도차이나 반도 가운데 유일하게 베트남만 점령하지 못했다. 쩐흥다오라는 베트남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몽골 침략군을 두 차례에 걸쳐 하노이 북부에서 격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트남 역사에서 쩐흥다오 장군은 우리의 이순신 장군 정도로 추앙받는다. 지금도 수도 하노이 중심가에는 쩐흥다오 장군의 사당과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두 번째는 1954년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를 물리친 디엔비엔푸 전투를 꼽는다. 19세기 리 왕조가 통치하던 베트남은 1885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된다. 50여 년간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가 1940년 독일 나치에 패하면서 베트남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이 틈을 타고 일본이 진주한다. 당시 베트남은 호찌민이 주도해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월맹)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베트민은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외세를 몰아냈지만 프랑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베트남이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며 극동원정군을 파견했다.
1954년 호찌민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1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고 독립을 달성한다. 이 전쟁은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군대를 격파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베트남은 미국과 새로운 전쟁에 돌입한다.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민이 공산주의를 표방하자 미국이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개입했다. 이른바 제네바 협정으로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베트남은 이후 20년간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 기간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국제 여론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100만t의 폭탄을 퍼부으며 55만명을 파병한 미국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미국은 끝내 1973년 베트남전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 길에 올라야 했다.
미국이 손을 뗀 베트남은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을 맞았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또 하나의 강대국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 번째 전쟁은 1979년 8월17일 덩샤오핑의 중화인민군이 베트남을 전격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 국경 26개 지점을 통해 보병 20만명, 항공기 170대, 탱크 200여 대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명분은 한 해 전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를 주도하던 폴포트의 크메르루주 독재정권을 베트남이 무력으로 전복시킨 데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중국은 폴포트 정권의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던 터라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이면서도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다. 17일간 계속된 이 전쟁에서 중국은 사망자 2만6000여 명을 낸 채 퇴각했다. 당시 게릴라 부대 10만명을 이끌고 이 전투를 지휘한 베트남 지휘관은 보응우옌잡 장군으로 그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프랑스, 미국에 이어 중국까지 세 차례에 걸친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침으로써 베트남의 살아 있는 영웅으로 숭앙받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지난해 10월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베트남에 진출해 사업을 하는 한국군 파월 장병 출신 2명도 참석해 현지에서 화제를 낳았다. 백마부대 소속으로 3년간 참전한 김 아무개씨와 십자성부대 출신 이 아무개씨가 베트남 측의 초청을 받아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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