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셋째오빠가 평창으로 이사를 온 후 나는 거의 매달 한번씩 평창을 오가고 있었다.
평소, 총기 넘치고 건강하던 오빠가 5년 전인가? 몽골에 출장을 갔다가 거기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60도 안 된 나이였는데... 역시 아홉수를 넘기기가 어렵다는 얘기는 헛말이 아니었던가...
다발성 뇌출혈이라고. 큰오빠가 몽골에서 데리고 돌아왔을 당시엔 다리에 마비도 있었고
언어장애는 물론 인지능력, 기억력도 제로인, 마치 금방 태어난 신생아와도 같은 상태였다.
오빠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어서 평소 주말이면 등산이며 골프, 낚시를 즐기고 운전도 잘 하고 담배를 피우고
해외출장도 잦았고, 시간날 때마다 반려견 단풍이와 인근 산을 산책하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자 큰오빠 내외와 나의 가족은 매우 힘들어졌다.
오빠는 함께 사는 가족이 없었는데다가 연로하신 엄마에게 이 사실을 차마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십여년이 지나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긴 하지만....
둘째 오빠 역시 중국에서 파견근무를 하던 중에 급성 백혈병이 발병해서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엄마에게 3박4일 예정으로 떠난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세째 아들이 또 그렇게 쓰러졌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가 추석 무렵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비행기 표를 못 구했다, 간 김에 여러군데 들렀다 온다더라,
다른 나라로 바로 또 출장을 갔다며 여러 핑계를 둘러댔지만 오래 속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오빠는 회복이 빨랐다.
머리 이곳저곳에 있던 멍이 풀리면서 다리 마비도 풀렸고 말도 조금씩 하고 식구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애 같아서 분별력이 떨어져 있었고 전두엽 손상의 영향으로 화가 많아지고 기억력이 매우 나빠졌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라고는 수면제를 먹여 온 몸을 침대에 묶어 억지로 재우는 시간 뿐,
깨어있는 시간엔 계속 답답해하며 일어서려고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다리엔 힘이 없었기에 무의식 중에 헛발을 내딛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바람을 쐬러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갔다가 집에 가야겠다며 갑자기 차도로 내려가는 바람에 큰일날 뻔 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휠체어를 밀고, 한 사람은 링거스탠드를 끌고, 한 사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덕분에 큰오빠와 언니, 그리고 나와 간병인까지 4명이 매달려 병원생활을 했다.
우리 형제는 둘째오빠를 보낼 때도 그랬었다. 일도 대충 하면서 매일 병원에 매달려 있었다.
그땐 그래도 세째오빠도 함께 했었는데, 막상 둘째오빠가 없는 상태에서 가족도 없는 세째오빠가 이렇게 되니...
이젠 오롯이 큰오빠 내외와 내가 감당해야 했다.
한편 오빠는 토막난 자신의 기억을 붙잡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추리해보려고 애썼다.
그땐 횡설수설하던 오빠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맞는 부분도 있었다.
입원 두 달이 안되었을 때 퇴원을 했다.
병원에 있어봤자 더 이상의 의미있는 치료는 할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의사는 언제 퇴원을 할 수 있느냐는 환자의 말에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야 뇌를 다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각 환자들이 겪고 있는 증세에 대한 의학적인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신체의 어느 부분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 기억을 잃은 사람,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얼마나 환장을 할 노릇인가.
그러나 그 의사는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좋은 의사는 아니었다.
어쩌면 매일같이 의료진에게까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성가신 환자를 그냥 빨리 내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병원으로부터 쫒겨나는 느낌으로 퇴원을 하여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우선은 큰오빠네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하루도 못 넘기고 자기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우리 네 사람은 밤길을 달려
안양에서 광주 신현리 세째오빠네 집으로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익숙한 곳이 환자에게는 나을 테니까 하고.
두 달 가까이를 비워 놓았던 집은 먼지가 가득했고, 갈아입을 옷 한가지도 못 챙겨온 우린 그렇게 거기서 하루를 넘겼다.
다음 날부턴 각자 분업을 하여 언니는 식사와 약을 담당하고 (식전 식후 한약에 병원약까지 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나는 묵은 청소와 집정리, 운전 등을 맡고 큰오빠는 무의식적으로 찾는 담배를 잡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임무였다.
한의사가 담배를 피울거면 약을 아예 가져가지도 말라고, 흡연은 절대 금지라고 단호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두 달 가까이를 세째오빠의 집에서 형제들이 함께 지냈다. 집엔 교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그러는 사이 오빠의 지능은 점점 나아져 처음엔 엄마 눈치 살피는 일곱살 같았는데 어느 날은 반항적인 열네살쯤 되었다.
담배를 못피우게 하자 우리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엉뚱한 카드를 들고 편의점에 가서 담배를 사려고 하기도 하고
어느날은 서랍에 모아 둔 동전을 들고 몰래 나가 정말로 담배를 사기도 했다.
따라오는 큰오빠와 나를 피해 자기만 아는, 아니 평소에 습관적으로 다니던 길을 꼬불꼬불 돌아 우릴 따돌리려고도 했다.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다같이 회사로 출동했는데 거기서 큰오빠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리기도 했다.
무슨 미성년자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참, 웬만하면 정말 그냥 한 갑 사주고 싶기도 했지만 흡연만큼은 치명적인 시기라는 한의사의 말에 큰오빠는 정말 필사적으로 말렸고 그 결과 세째오빠는 큰오빠를 미워하고 원망하기에 이르렀다.ㅠㅠ
그러더니 드디어 어느 날엔... 왜들, 자기네 집 놔두고 우리집에서 지내느냐고....헐......
그렇게 큰오빠와 나는 쫒겨나듯 각자의 집으로 왔다. 오빠가 다친지 3개월 여 만이었다.
출장 가면서 우리 집에 맡겨 놓았던 단풍이는 거의 두 달 만에 주인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그동안 지들이 사람인 줄 아는 오빠의 단풍이와 우리집 도도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라서
나의 딸 솔양은 집안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다니던 영어학원도 그만 두고.
오빠는 혼자 많이 힘들어했다.
우선은 자기에게 닥친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어 했고 왜,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원망했다.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았다고 큰오빠를 미워했고, 그래서 생전에 살갑고 절친했던 둘째 오빠를 많이 그리워했다.
총기가 없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화가 나고 당황스럽고... 그러다가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나는 그런 울분과 하소연, 화를 자주 들어주었다. 때론 전화 통화를 두어 시간씩 하기도 했다.
그 속이 어땠겠는가... 이해한다는 말이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그냥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한다던 의사의 냉정한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 오빠에게 단풍이의 존재는 큰 위안이었다.
전생에 무슨 부부사이라도 됐던 건지 아련하고 깊은 눈길로 오로지 주인만을 바라보며 유난히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는 단풍이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단풍아, 니가 효자구나...
덕분에 오빠와 나는 많이 가까와졌다.
오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눈 말들보다 1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더 많은 대화를 했다.
오빠 입장에서도 내가 동생이다보니 편해서였는지 무슨 일만 있으면 나에게 연락을 하고 때론 부탁을 했다.
나는 기꺼이 들어주었고 이따금씩 오빠집에 들러 음식을 해 주고 냉장고와 주방을 정리해 주고 잔소리도 해 주었다.
셋째오빠와 나는 여섯살 차이다. 둘째 오빠랑은 아홉살 차이. 큰오빠랑은 무려 띠동갑이다.
오빠들에게 나는 그저 막내일 뿐이었는데, 어느날인가부터 내가 집안의 주요 업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빠들 나이 먹을 때 나도 같이 먹고 있었다는 것을 오빠들은 이번 일을 겪으며 새삼 느낀 듯 했다.
막 퇴원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루는 오빠를 챙겨주며 잔소릴 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세째오빠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니가 내 동생인데 지금은 꼭 누나같구나...
얼마 전, 오빠와 옛날얘기하며 이런 얘기를 했더니 웃으며 그런다. 맞는 말 했네~
그땐 그랬다. 다 나으면, 웃으면서 옛날얘기 할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오겠지...
그래서 지금은 기쁘다. 그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오빠가 좋아져서.
어느 날인가부터 오빠가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며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안양 병목안 수리산은 오빠가 좋아하는 산이었다. 적당히 높이도 있고 코스도 다양하고.
매 주말마다 단풍이를 데리고 수리산 등산을 하고 내려와 엄마집에 가서 엄마를 뵙고 오는 일정이다.
아들집에 가서 밥이라도 해 주고 싶어하시는 엄마의 연세가 당시 여든아홉이었다.
엄마는 나를 호출하셨다. 얘, 오빠가 온다는데 니가 와서 오빠 밥 좀 해줘라. 내가 해주고 싶은데 이젠 자신이 없다...
엄마, 오빠가 엄마한테 밥 해달라고 가는 거겠어요, 왜 그런 걱정을 해요?
밥은 사먹어도 되고, 큰오빠네 가서 먹으라고 해도 되는데 꼭 아들 밥 해주라고 딸을 불러야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결국 갔다. 안 갈 수가 없지...
참, 오빠네서 우리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12월 말에 나는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또 얼마 안지나 1월 초에 엄마가 추운 새벽에 성당에 나가시다가 구안와사가 와서 한 6개월을 병원엘 다니셨다.
당시 큰 올케는 조카의 출산으로 캐나다에 가 있었고 몇 달만에 아기와 조카와 함께 온 이후로도 백일에, 돐에 일이 많았고
엄마의 수발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아침 출근, 저녁 퇴근.
1일 약 8시간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이자 며느리보다는 편한 딸.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 청소와 식사준비, 심부름과 기타 모든 일.
엄마는 평소에도 까다로운 성격인데 환자가 되고 보니 더 예민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셨다.
내 집은 돌볼 여유가 없었고, 나는 거의 10개월을 내 일도 못하고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그래서 엄마가 좀 어지간해 지실 때쯤 출퇴근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핑계로 자연스럽게 OUT했다.
그 후로도 여전히 주 1회는 오빠와 엄마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내가 필요했다.
발음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목청이 작아진 오빠와 귀가 어두워진 엄마의 대화는 직접적인 대화가 힘들었다.
내가 중간에 큰 소리로 엄마, 이건 이렇구요~ 저건 저렇대요~ 하면서 몇 시간 지내고 오면 집에 올 땐 기진맥진해 진다.
나는 이제 주말이 없어졌다. 하루는 엄마, 하루는 밀린 집안 일.
신랑님이 많이 도와주긴 해도 심적으로 마음이 한가롭지 못했다.
바쁜 스케쥴의 프로젝트가 걸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모든 잡신경을 일에다가 쏟으면 그것이 차라리 견딜만 했다.
오빠가 자꾸 아는 사람 없는 산골에 가서 혼자 조용히 살다가 가겠노라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필리핀으로 가서 산악 안내원 일을 하겠다고 라이센스까지 땄다.
아니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무슨 말이야, 그러다 아프면 어쩌려고~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누가 말리겠나.
가족들의 설득과 본인의 고민 끝에 국내로 바꾸기는 했으나 자꾸 멀리 가겠단다. 산좋고 물이 있는 곳으로.
그러면 차로 두 시간 이내로 해. 더 멀면 내가 다니기 힘들어서 안돼.
결국 전국을 놓고 고르고 골라 선택한 곳이 강원도 평창군이다.
가까이 낚시할 수 있는 물도 있고 매일 등산할 수 있는 산 밑 동네.
그렇게 해서 살던 집을 내놓았는데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와서는 이렇게 드러운 집은 처음이라고,
이대로는 집 못 파니까 청소 좀 해 놓으라고 했다면서 전화가 왔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 참!
자세히 보니 개집으로 쓰던 거실 베란다 바닥이 습기로 인해 손상이 크고 붙박이장 안엔 곰팡이가 무성했다.
오빠가 낚시를 다니지 않으면서 베란다 장을 열어보질 않다 보니 통풍도 안되고 하다 보니...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셀프시공 계획을 세우고 자재를 구입하거나 회사에서 쓰다 남은 자재들도 모으고 해서
남편님의 도움을 받아 거실 베란다와 주방 베란다를 깔끔히 칠하고 붙이고 바닥도 비닐타일을 깔아주고
망가진 곳 보수하고 선반 새로 조립해 넣고...... 덕분에 천만원 더 받고 팔았다.
이사도 오기 전부터 오빠는 집이 작다며 증축을 하고 싶어했으나 무허가 아닌 정식 절차를 밟아서 하자니
시간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도 마침 오랫만에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고.
내가 좀 살아보고 결정하자며 말렸다. 일단 겨울이나 나 보고 결정합시다.
짐은 내가 줄여줄께, 내가 다 알아서 해 준다니까! 자, 버릴 건 좀 버리자구!
그렇게 이사 전부터 주말마다 함께 짐정리를 하고 평창집을 실측하여 가구배치 계획을 잡고
가져갈 짐과 안 가져갈 짐을 미리 정해서 안 가져갈 짐들을 처분하여 이사를 도왔다.
이삿짐 들어간 날과 다음날까지 아쉬우나마 겨우 짐정리를 마치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후에야 출발해서 집으로 왔다.
암튼, 그렇게 해서 나는 이제 경기도 광주가 아니라 강원도 평창군까지 오빠를 보러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사회성이 좋은 오빠는 나름 잘 적응하여 살고 있었고 소원대로 대형견도 한마리 입양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머리 좋기로 유명한 보더콜리를 데려와 접종도 하고 중성화도 시켰다.
그녀석 '쫑'이와 함께 매일 산에 오르는 것이 새로운 일과다.
힘이 장사인 이 녀석은 감히 가까이 하기도 힘들다. 반갑다고 달려들면 내가 뒤로 넘어갈 정도다.
오빠는 원래 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아예 개들을 위해서 산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은 뭘 먹었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개들을 위해선 매일같이 고기를 삶고 간식을 사온다.
이젠 늙어서 이가 다 빠진 단풍이를 위해 음식을 씹어 뱉어서 손바닥에 놓아 먹인다.
제발, 남보기 좋지 않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다.
얘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련~하다니까... 하면서 흐믓한 미소로 같이 바라볼 뿐이다.
으이그~ 내가 못살아, 개만 먹이지 말고 오빠도 좀 챙겨 먹으라고~~~
음식을 해서 보내주거나 사다 주어도 어디 뭐가 있는지 기억을 못하고 상해서 버리기 일쑤다.
한달에 한번 정도 평창에 내려가면 나는 다리접고 앉을 시간이 없었다. 집에 오는 순간까지 할 일이 보이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진리다. 인생 모른다.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ㅎㅎ
짧은 결혼생활로 30년은 넘게 혼자 살아온 오빠가 이곳 평창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성치도 않은 남자를, 한눈에 반해 먼저 고백했다는 오빠의 그녀는 음식 솜씨 좋은 그 동네 맛집 사장님이다.
우리 형제들은 두 사람을 정말 소중한 인연으로 여기며 반기고 축하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오빠는 매우 쑥스러워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해맑게 밝아보여 보는 사람이 더 흐믓해진다.
인연을 찾아오려고 굳이 이 먼 곳까지 오겠다고 했구만~~~^^
이제는 오빠네 집에, 일하러 오는거 말고 그냥 놀러만 오라고. 새 올케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있다가 온 날이다.
명분은 그냥 맛있는거 먹으러 오라고 해서 삼남매의 내외가 모인 날이었는데
알고보니 이 날이 큰오빠의 칠순 생일이었다. 동생들이 큰형 생일도 기억 못하고. 쯧쯧...
어쩐지, 큰오빠 내외가 강원도로 여행을 왔다가 합류한 거였는데 갑자기 웬 여행? 했었는데...
새 올케가 차려준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바로 뒤의 산과 계곡을 낀 산책로를 걸었다.
식당 영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방림싸롱"이라는 동네 카페에도 갔다.
저녁엔 양고기 구이와 매운탕을 해 주어서 또 푸짐하게 먹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소외감 없는 형제들의 즐거운 시간인가.
정말 좋았다. 날씨도 풍경도 음식도 사람도 시간도.
해가 지자 담장 위로 새끼손톱 끝만한 조각달이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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