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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 20150414

by lucill-oz 201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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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러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주차가 만만치 않은 동네니만큼 차를 안 가지고 나왔다.

버스와 지하철 4호선과 2호선을 타고 걸어서 한참... 

스마트폰의 지도앱을 켜고 골길을 더듬거리다가 도로를 한 번 건넜더니 갑자기 눈 앞에 산울림 소극장이!

 

첫 방문인 산울림 소극장은 입구가 협소한 점에 비하면 지하 극장공간은 꽤 아늑해보였다.

무대를 향하여 반원형의 구조로 배치된 좌석은 무대로의 집중력을 높여줄 것 같다. 

의외로 학생관객들이 많았다. 개중엔 책과 노트를 펴고 공부를 하는 듯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의외로 공연 시간이 꽤 길었다...

 

아주 단순한 무대, 그리고 별 의미없는 대화들, 우스꽝스러운 동작들..

이러한 대사들로만 세시간의 공연을 할 수 있다니... 싶을 정도로 

어쩌면 최대한 관객으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도록, 그들의 지루함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막이 끝날 때마다 그 지루한 기다림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소년의 전언.

최종적으로는 허무감마저 느끼게 만들어준다.

 

이파리 한 장 없이 앙상한, 기괴한 분위기의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무대.

그 나무 아래서 에스트라공이 신발을 벗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곧 그의 친구 블라디미르가 도착한다.

 

블라디미르(디디)는 등장인물 중 가장 제정신으로 보인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그를 기다리는 것에 그의 하루의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에게 무언가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고 

고도가 오지 않을 것임을 전해주는 소년에게 고도에 관해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한다. 

고도가 자비로운 인물인지, 공정한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독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고도보다 에스트라공을 먼저 기다린다

 

에스트라공(고고)은 블라디미르와 함께 고도를 기다린다.

매일 오후가 되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그 언덕으로 고도를 기다리러 온다.

아니,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를 만나러 온다.

그에게는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우스꽝스럽고 유아적이며 뭐든 자주 잊는다.

그들이 바로 어제 여기서 만나 함께 고도를 기다렸다는 사실조차 툭하면 잊는다.

그러나 둘은 오십년을 보아온 친구사이다.

 

이 두 사람의 의복은 더할 수 없이 낡았으며 그들의 모습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고고는 그의 발에 신발을 신었다기 보다는 신발이 그의 발이 끼워져 있는 듯 언제나 신발 벗기가 힘들다. 

두 사람은 매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언덕에 나와 고도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은, 기다림 지체가 목적인 그 시간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을 쓸데없는 언어유희와 장난으로 시간을 때우려 하지만 그조차도 곧 시들해진다.

 

 

그러던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두 사람이 등장한다. 포조와 럭키.

고고와 디디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을 즐겁게 메워줄 일대 사건인 것이다. 

 

1막의 포조는 아주 포악하다. 그의 하인 럭키를 대하는 것을 보면 마치 짐승을 다루듯이 한다.

그의 태도는 아주 거만하다. 고고와 디디를 대하는 태도 역시 공손치는 않다.

적선하듯이 고고에게 뼈다귀 조각을 던져주기도 한다.

 

럭키는 가장 애매한 인간이다. 목에는 언제나 밧줄을 걸고 있으며

그는 짐승을 대하는 듯한 자신의 주인에 대해 지나치게 순종적이다. 대꾸도 하지 않는다.

내려놓아도 될 무거운 트렁크를 언제나 들고 서 있는다.

그러나 그의 입이 터지자 무지막지하게 엄청난 양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힘은 세 사람이 쩔쩔맬 정도로 엄청나서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포조가 그를 무거운 짐으로, 밧줄로 얽어서 그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포조와 럭키가 한바탕 그들을 휩쓸고 지나간 후 그들은 또다시 지루해진다.

그리고 '고도'씨를 기다리는 그들 앞에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그들에게 고도씨가 오늘은 오지 못한다고, 내일은 꼭 오시겠단다고 전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늘 오지 않은 고도에 대한 절망과 동시에

내일 온다는 고도에 대해 또다시 새로운, 하루치의 희망을 걸게 된다.

만일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무에 목이나 매자며...

나무에 목을 맨다는 말이 마치 낮잠이나 한 잠 자자는 듯이, 술래잡기나 한 번 하자는 듯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하자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게 1막에서 던져놓은 럭키의 모자가 널부러져 있는 채, 

고고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이 그대로 놓여진 채로 2막이 시작되나 그들은 여전히 지루하다.

달라진 점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파란 잎이 몇가닥 생겨났다는 점 뿐이다. 

신발과 모자를 소재로 의미없는 대화와 놀이가 오가지만 그 시간은 어제인지 오늘인지조차 모호하다.

 

그들 앞에 어제와 조금 다른 모습의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는 앞을 볼 수 없다고 하고, 럭키는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주인과 하인)에는 변화가 없어 보이나 이제 포조는 럭키에 의존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의 처지의 변화는 무슨 의미일까?)

 

또다시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고도의 소년이 그가 오늘도 오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목을 매려 시도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꼼짝없이, 그들 앞에는 내일의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고, 그 모습은 절망스럽게 느껴진다. 

그 절망감은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았음에 대한 절망인지, 

아니면 내일도 역시, 죽지도 못하고 이 지루한 기다림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인지

... 잘 모르겠다.

 

 

고도는 어떤 존재일까?

서너마디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별로 많지가 않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의 기다림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아니, 그것조차도 어쩌면 두 사람의 바람일 뿐, 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년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추가 정보 중 첫 번 째는

그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다림을 유도한다는 사실이다.

소년을 보내지 않아도 될 텐데 굳이 날마다 소년을 보내 

늘은 못 왔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고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그 공허한 약속을.

(소년의 모습에서 마치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일깨우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 바빠서 못 온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안 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안 오는 것이다. 고약하다.

블라디미르는 고도가 자비로운 사람인지 궁금해한다. 소년이 맞지는 않는지 묻는다.

소년은 고도씨가 자신은 때리지 않으나 자신의 형은 때린다고 한다.

한없이 자상하지만도 않고 또 한없이 무섭지만도 않은 모습이다.

누군가에게는 자비를, 누군가에게는 응벌을 내린다는 말이다.

어쨋든 고도의 본질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내심을 가지고 끝없이 자신을 기다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다림 자체를 통하여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듯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도록 만든다. 아주 나쁘다.

아주 나쁜 '현실'의 얼굴.

 

 

나는 사실 관극이 좀 지루하게 느껴진 부분이 있었다.

고고와 디디가 주고받는 무의미한,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양의 대사들.

어쩌면 내가 지루함을 느꼈다는게 제대로 관극한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작품이 노벨상을 수상하고 연극의 고전이 된 배경에는 무엇이 어떤 힘이 있을까?

고도가 의미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희망이, 평화가 고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거창한 명제가 아니더라도, 그저 오늘보다 좀 더 나아질 그 날을 기다리는 소시민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기를 바라는 많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들에게는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들처럼 허름한 차림을 하고, 그들처럼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어 누군가(고도)에게 의지해야 하는 현대인들(나를 포함한!)이

오늘은 오지 않았지만 내일은 꼭 와 줄 것이라 믿는 내일에 대한 희망 혹은 작은 바램.

그것이 현재의 관객들이 느끼는 막연한 고도의 정체가 아닐까.

그래서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목이나 매자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대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도 없는 그들의 처지가,

그래서 또 하루를 그저 고도를 기다리는 일에 목을 매며 살아야 하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웬지 모르게 가슴을 아리게 만들어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85년이었거나 그 이후였던것 같다. 

종로에서 이 공연의 홍보 포스터를 처음 보며 궁금해 했던 것이.

그땐 고도가 사람의 이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도가 뭐야?

임영웅 연출은 45년 전에 고도를 처음 연출했다고 한다.

그때는 그분도 매우 젊은 시절이었을텐데... 그에게 고도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와 함께 공연했던 당시의 젊은 배우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을 했을까?

원로까진 아니지만 명실공히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대 배우들의 열연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인생을 좀 살아본 경험이 있는, 연륜이 있는 배우들이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싶은.

어렴풋하게나마, 보는 이들도 하는 이들도 고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을 만나려면 말이다.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생각은 많아지는 작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레드'에서 로스코의 대사가 생각난다. 

"난, 네가 생각하게 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재미있지는 않은데...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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