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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연극

곡비 - 20231026

by lucill-oz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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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 보는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미아리 고개 구름다리 아래에 위치.

지도로 시뮬레이션 해 보고 오지 않았다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그런 위치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이런 곳에, 이런 위치에 이런 훌륭한 공연장이!!

로비 공간이 없다는 애로사항은 그곳이 마침 고가도로 밑이라는 것으로 큰 도움이 되어

극장 입장 전 잠깐의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공연 시작 전, 베리어 프리에 대한 매우 세심한 배려가 담긴 긴 안내를 받았다.

몇 해 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의 '장애인들의 극장 접근성'에 대한 특별한 시도를 경험한 후여서인지

이러한 노력들이 제작 과정에서부터 현장에서 반영되고 있음이 반가웠다.

이 작은 공간으로의 진입을 위하여 따로 장애인용 램프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말이다.

 

 

윤상화, 전박찬.

믿고 보는 두 배우의 공연이니 오직 기대감 만을 가지고 예매를 했다.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두 배우였다.

 

 

[哭婢]  예전에, 양반의 장례 때에 행렬의 앞에 가면서 곡을 하는 계집종을 이르던 

[哭才人]  예전에남의 초상집에 가서 곡을  주던 천민.

 

곡비는 남의 슬픔을 위해  돈을 받고 울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이야 없어졌지만, 아주 어렸을 적에는 대신 곡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들어 본 적이 있다.

초상이 나면, 집안에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며 특히 아녀자들에게 곡을 강요하던 시절이었고

상갓집에 곡소리가 끊기는 것은 흉거리였다. 

상주들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  "아이고~ 아이고~"만 읊어대다가 힘들면 쉬기도 하고

손님들을 맞기도 하다가 더러는 웃기도 하다가 또 생각나면 또 한번씩  "아이고~ 아이고~" 하며

마른 울음을 울곤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는 좀 웃겼다는 기억이다.

물론 진짜 설움이 복받치며 혼절할 정도로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길게, 오래도록 우는 것은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힘든 일이다.

진짜 슬픔이 차올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울다 보면 차라리 혼절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직업이었을 것이다. 장례 기간 동안의 긴 슬픔을 대신 표현해 주는 직업.

그네들의 곡소리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긴 시간을 할 수 있도록 목관리도 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듣는 이들의 슬픔을 끌어 올려주어야 하니까.

그러려면 사실 그들은, 그 자신의 내면에 언제고 퍼올릴 수 있는 깊은 슬픔이 내재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옛날에는 그래서 주로 과부들을 섭외했다고도 한다. 아, 슬픔도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구나...

 

신분이 있던 시절이나 그 이후에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천한 계급의 사람들이 담당했고

비록 그 재주에 감탄은 할지언정 천하게 여겨지는 계층이었다.

말하자면 곡비는 지금의 '비극 전문 배우', 소비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곡비가 자신의 울음을 "콘서트"라고 표현한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울음을 예술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콘서트'라는 말에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곡비'에 대한 자료들은 조금 있는데 비해 '소비'에 대해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소비'는 '곡비'를 객관적으로 애정을 갖고 지켜봐 주는, 그러면서도 같은 곡비가 아니라 같은 듯  다른 영역의 일을 한다는 설정으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캐릭터인 듯 하다. 곡비 아카데미 설정과 같은 맥락에서.

소비는 한 걸음 떨어져 연인인 곡비를 관찰하고 그의 변화에 깊은 일침을 놓는다.)

 

곡비와 소비는 마치 데뷰를 기다리는 연습생 혹은 취준생들처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업계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청년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슬픔(죽음)을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 앞에 겸손한 그들은

서로의 슬픔을 대신해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곡비는 '위대한 곡비'로부터 조수로 일해 볼 것을 제안 받는다.

소비는 축하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순간 둘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나는 것을 소비는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곡비는 '위대한 곡비'를 따라 다니며 그를 동경하고 그처럼 성공하길 꿈꾼다.

곡비의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형 장례식장이나 혹은 대기업 집안의 초상에서만 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슬픔을 위해서는 더이상 그 위대한 울음을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을 위해 울어주어야 하는 곡비로서의 소임 대신에,

스스로의 울음을 내는 일에 집중하는 대신에,

점점 '위대한 곡비'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는 곡비를 보며 소비는 절규한다.

너는 곡비의 본질을 잃었고 나도 잃었다고.

 

 

'위대한 곡비'역의 색자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었다.

검색으로 알게 된 그는 MTF 트랜스젠더이고, '드랙퀸'과 '드랙킹'이 둘 다 가능한,

그들 세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한 번 봤을텐데...)

첫 등장씬부터 성별을 알 수 없는 독특한 외모와 음색의 중년(혹은 장년?) 배우가

독특한 카리스마를 자아내며 독특한 분위기의 '위대한 곡비'를 보여주었다.

내면에 깊은 고독감과 슬픔이 있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도 있는,

곡비에게로 향한 미묘한 마음도 있는. (더 가까이 오지 마라, 더 멀리 가지도 말라는 대사가 보여주는)

의도적인 캐스팅이었을까? 

전통적인 곡비의 이미지는 여자인 것 같은데 극중의 위대한 곡비는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었어도 상관이 없기도 하다.

그러한 미묘한 느낌을 위해서 그 이미지에 딱 맞는 사람으로 캐스팅한 걸까?

암튼, 무대에서의 아우라가 대단한 배우였다. 

진짜로 한번쯤 곡을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다는...

젠더 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해 곡비와 소비를 같은 남자로 설정했는지 모르겠으나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여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세계의 이야기다. 

 

 

조수. 지금 용어로는 문하생이나 수련생 쯤 되려나?

반복하고 터득하여 내 방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모든 분야의 세계에는 위아래가 철저한 법이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란 미묘한 것이

처음엔 일방적으로 선생의 위치가 우위에 있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제자가 어떤 의미로든 각성을 하게 되면 선생을 뛰어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물론 제자에 따라 그 속도나 결과가 다 다르긴 하겠지만)

그 순간의 선생의 위치라는 것은 달라진다.

여전히 존경하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실망스러운 위치였다고 인식될 수도 있고,

알고보니 사깃꾼이었다고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곡비는 각성은 커녕 선생의 세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스승의 무게감에 스스로 눌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소비의 일침은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의 일침은 비수가 된다.

위대한 곡비는 마치 이젠 너 스스로를 찾으라는 듯, 겉옷을 단 아래 벗어놓고 계단 위로 사라진다...

그 겉옷은 누구의 제자라고 하는, 곡비의 이름 앞자리를 꾸며주는 명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위대한 곡비'가 사라지는 것은 그의 죽음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제자를 분리시켜 준다는 의미일까.

곡비는 주저하다가 천천히 위대한 곡비의 겉옷을 주워 입는다.

 

 

예술가의 성공이란, 다른 분야에서의 성공한 자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다.

지금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겠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예술가,

명망을 얻고, 비싼 값에 팔리는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예술가들에게는

부러움과 동시에 '변질'이라는 단어도 따라 다녔다.

초심을 잃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물건을 생산해 낸다는 비난 말이다.

그러면 예술하는 사람들은 다 죽을 때까지 배를 곯아야 하느냐는 소리가 당연히 터져나오게 마련이고.

당연히 그러면 안되는 것이긴 하지만...

뭐, 결과론적인 얘기일 수 있겠지만 가난 속에서 태어난 '결과물'들에는

무언가 순수함이 같이 느껴진달까. 뭐, 그것도 역시 포장일 수도 있겠다만...

예술가의 삶은 그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과 결을 같이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려면 그의 삶도 같이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곡비는 과연, 이후에 위대한 곡비가 되었을까?

최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그 외로운 혼자의 싸움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절규로 각성하여 오롯이 곡비의 소임을 다 했을까?

있는 자들만을 위하여 우는 곡비가 아닌, 보잘 것 없고 외로운 이들의 죽음을 울어 주었을까?

부디, 그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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