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지아트센터.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올라오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공연장에서 들리는 대사가 너무도 선명하게 귀에 꽂힌다.
뭐지? 연습중인가? 평일이라도 그렇지 로비가 너무 조용한데?
아뿔사! 공연시간을 착각한 탓에 공연은 이미 시작한 지가 십여분이 더 지난 상황이다. 이런!
오늘따라 퇴근시간에 임박해 급한 일이 몰리더니만, 정신이 어떻게 된건지
겨우 잡은 아까운 표를 부여잡고 쓰린 마음으로 공연장 밖에서 1막을 날리고 말았다.
문앞에 의자를 놔 주며 앉아서 모니터로 보라고 하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은 귀로 들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공연 시작 후엔 입장 불가라고 하지만 맨 뒷줄은 꽤 많이 비어있더구만...
이순재 옹의 리어왕.
그가 곧 리어 그 자체인 것 같은 느낌.
데뷔 67년이 될때까지 이렇게나 왕성한 무대활동을 할 수 있다니.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물론 나도 체력만 허락한다면, 그리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일.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지혜로워지는게 아니다. 당연하지만.
"지혜로와질 때까지 늙지 말았어야지"라는 광대의 대사처럼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였다고 해서 내 경험만을 믿어 결과적으로 어리석어지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작품 속의 리어왕을 보면 그는 어쩌면 어리석다기 보다는 너무도 순진 무구하다.
아첨하는 자식과 진심인 자식을 구분해 내지 못하여 스스로 불행을 자처한 왕이라니.
(이래서 죽을 때까지 미리 유산 분배는 하지 않는 것이라고, 끝까지 내가 쥐고 있어야 자식들이 끝까지 효도한다고
우스갯 소리처럼 노인네들이 얘기하지만 이건 인간사의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젊어서 힘이 있고 권력이 있어야 권위도 누릴 수 있는 것인데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는 그를 어른으로 대우해 주는 젊은이를 만나야만 그가 어른인 것이다.
켄트백작 같은 사람 말이다. (그가 리어 보다는 젊었을 테니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준 재산과 권력을, 자식들이 나에게 사용할 때 그 자괴감이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 것이라 했다).
글로스터 백작 또한 작은 아들이 큰아들을 모함하는 바람에 큰아들은 들판의 광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가 현명하여 작은 아들의 간교함을 알아 차렷다면 좋았을 것을.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현명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러나 또 세상엔 악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얽히고 설켜서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후에 그 능력과 가치를 인정받은 많은 예술가들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이미 최고 인기작가였단다.
그는 무엇을 통해서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았을까 싶다.
도대체 그의 주변에 어떤 인물들이 있었기에 이런 모티브들이 나왔을까 싶은.
셰익스피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뭐랄까, 고전문학을 다시금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러다 보니 요즘은 고전극에 좀 치중하는 느낌이다. 책도 그렇고.
존경을 받으며 늙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것.
지혜와 인내를 갖고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에게 어른의 대우를 받는다는 것.
이건 애들이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가는 것보다,
또 죽어라 노력해서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쟁취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신체의 능력이 저하되고 기억력이 떨어지고 반사신경도 무뎌져 가고
내 능력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끝까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어쩌면 타인들에겐 노인의 어리석은 아집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맞도록 하자. 어른의 품위를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어른이라는 말이 이토록 무거운 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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