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에서 5시간짜리 연극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인터미션은 몇번?이었다.
한 번이라고 하길래 밥도 줘야 할 판에...라고 했더니 두 번으로 결정됐다는!
3시간 짜리 공연도 보고 일어나려면 무릎이 잘 안펴지는데... 걱정은 되지만 도전!
트로이 전쟁은 참으로 많은 사연들을 낳고 또 낳았다. 여러 인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다.
이번 극은 그 중 '아가멤논'이 아닌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그의 딸들 '이피지니아'와 '엘렉트라'가 중심 인물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론적으로는 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과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아가멤논은 자신을 위한 전쟁도 아니었는데 굳이 자식까지 죽여가며 그 전쟁에 참가해야 했는가.
(물론 그가 범부가 아니었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일지도 모르겠다만)
신탁을 내리는 신들은 왜 그들의 신탁을 이행했을 때 돌아올 인간들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가.
1막의 아가멤논은 그렇게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비극의 씨앗을 뿌려놓는다.
극 초반 클리템네스트라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친 남편을 용서할 수 없는 어미의 분노는 정당하니까.
그러나 그녀가 오롯이 혼자 복수를 행했는가. 그녀는 또다른 복수의 희생자가 아닌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또다른 딸 엘렉트라.
아버지로부터 동생을 잃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를 잃은 그녀의 분노는 또다른 비극으로 치달을 뿐이다.
비극의 본질은 무엇일까? 부당함? 억을함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일까?
결국 이러한, 삶의 어느 싯점에 상처로 남은 사건들은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고 끝까지 남은 시간들을 괴롭히고
때로 대물림되기도 한다.
3막은 이러한 예를 보여준다.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억지로 만든 아주 잘못된 용어다.)
그 긴 시간을 이어가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대단했던 공연이었다.
살면서, 비극은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완전한 극복은 어려울 것이다. 언제고 들추면 드러나는 상처가 자리잡고 있을 테니까.
그것을 견디는 힘은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유대감 같은 것들이 아닐까.
비극이 비극을 낳는 경우는 많이 볼 수 있다.
비극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최선이고 누구의 마음에든 그 씨앗을 남기지 않는 것이 또한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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