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공연, 혼자서 관람.
한 번 쯤 보고 싶었었다.
정웅인, 정재은 캐스팅이다.
얼마 전까지 국제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일하던 그녀 연옥!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딸은 공부시킬 돈도, 생각도 없던 부모에게서 벗어나 집을 나왔다.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학보사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에 빠졌다.
학생운동 중 전경들에게 쫒겨 도서관에 숨어 들었다가 그 남자 "정민"을 만난다.
둘은 틈만 나면 토론과 논쟁을 벌인다.
한국 시리즈 결승전이 있던 날 밤, 둘만의 역사가 시작됐다.
현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저명한 교수인 정민!
대학 졸업 후, 지방대학의 시간강사였던 시절, 정민은 미혼모이자 학생이었던 양선이와 2년간 동거를 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양선의 아이가 처음으로 혼자서 자전거를 타던 날,
자신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놀라 그녀를 떠났다고 했다.
아빠라는 호칭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 때문에 겁이 났다고.
연옥이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시절, 둘은 한 달 간 같이 지냈다.
그러나 일에만 묻혀 사는 연옥을 보며 정민은 외로움을 느끼고...
정민이 떠난 후, 그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연옥은 정민에게 알리려 했으나
그 때 결혼 소식이 담긴 정민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정민에게 알리지 못한 채 딸 이경을 낳았고
결혼한 정민은 아내의 배신으로 헤어지고 만다.
그들의 집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나...
찌질하게 우는 정민, 시원하게 욕을 날리며 정민을 위로하는 연옥.
연옥이 미국 특파원으로 나가 있을 때, 엄마의 죽음을 정민을 통해서 전해 듣는다.
엄마에 대한 아무런 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눈물이 나는걸까.
아, 어쩜 내 딸도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구나.
어느 해인가, 연옥과 정민은 함께 휴가를 가기로 하고
공항에서야 비로소 딸 이경의 존재를 알게 된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는 정민.
한편 이경은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아닌 남자 친구와 살면서
카페에서 일을 하던 중 임신을 하게 된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 특히 엄마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해 있는 이경.
엄마는 자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 온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엄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 한번의 엇갈린 모녀관계가 형성되었다. 연옥이 그녀의 엄마에게 가졌던 원망처럼...
연옥... 위암에 걸렸다고 한다.
죽으면 그만인데, 의사는 천천히 준비하라고 한다. 뭘 준비해야 하나.
일을 그만두고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연옥에게
언제나처럼 불쑥 정민이 찾아온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 토론을 하자고 제안한다. 옛날 그 때처럼.
웬지 모르게 설레이는 연옥.
그렇게 그들은 매 주 한 번 씩 만나, 비겁함과 역사와 죽음과...그런 주제들로 토론을 벌이고
번번히 토론은 다툼으로 번지고 만다. 사건은 같아도 기억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남는 거니까.
그러나 그런 시간들을 반복하며 그녀는 그와의 모호한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 친구? 연인? 파트너? 서로에게 가장 냉정한 천적?
정민이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전에 용기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용기란 겁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란다. 그럴듯 하군.
정민은 자기가 비겁하다고, 또 비겁했다고 말한다.
자기가 무책임한 남자라는 걸 알지만 그렇다해도 책임지는 건 싫다고,
그러나 자신은 그걸 인정하므로 자기는 용기있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는 그에게, 아니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었음을 깨닫는다.
아니, 서로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고나 할까...
그들은 늘 티격태격대며 싸웠지만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드러내놓고 바닥까지 따져본 적은 없었다.
연옥은 정민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는 자기감정에 충실해 본 적이 없는 여자였던 거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보단 언제나 남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충실하게 살아온 여자였다.
그런 연옥의 내면에는 어린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배울 기회조차 박탈당한 기억 때문에
스스로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길 거부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나의 감정이입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녀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온전히 그 자신으로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정민에 대해서는 그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지내왔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와 소통할 마음을 연옥 스스로 먹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를 받아들이면 내가 무너질 것 같은 생각에...
그러면서 어쩌면 바랬을 것이다. 정민이 먼저 밀고 들어오기를.
그가 늘 그래왔듯이 불쑥 들어오면 받아들일 용의는 충분했을 것이다.
정민은 아마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에겐 내가 들어갈 틈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아닌가보다... 나는 그저 친구인건가...
그래서 언제나 다른 곳에서 연인을 만들었을테고, 그래서 결혼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득 어느날 그녀가 그리워지고, 그러면 또 그렇게 불쑥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연옥은 정민만을 바라보며 사는 여자가 아니기에 그로 인한 외로움을 느끼진 못했겠지만
그렇게 정민이 다녀가고 나면 그녀의 가슴에는 한바탕 바람이 일렁였을 것이다.
연옥이 암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정민 역시 복잡하다.
그리고 그들의 딸 이경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고 싶어한다.
연옥은 마지막을 앉아서 준비하는 대신 일선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이왕이면 일하다 죽는게 멋도 있고 나답지 않겠냐며.
그러나 그것은 또 한번의 도피가 아닐까?
자기자신만의 세계 안으로의 도피.
솔직함이 주는 아픔 대신 견고한 나만의 울타리 안에서 편안해지고픈...
정민은 연옥에게 내가 내 비겁함을 인정하듯이 너도 너 스스로에게 솔직해라고 다그친다.
난 지금 힘들고, 정민이 니가 필요하고, 이경이가 걱정도 되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을.
연옥은 이경을 찾아가고 모녀는 어색한 만남을 눈물로 대신한다.
그러나 그 긴 시간의 공백을 한순간에 메우긴 어려웠을까.
연옥은 결국 시리아로 떠난다.
이경은 낙태를 결심하고 정민은 함께 병원에 간다.
정민은 사귀던 여인과 재혼한다.
이경과 그녀의 애인은 연옥의 집에서 지내고, 이경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정민은 이제 매주 목요일마다 연옥의 집에서 이경을 만난다.
연옥은 국경에서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보낸다.
정민, 처음으로 연옥의 편지를 받고 설렌다...
평일 낮공연의 어수선함 속에서 초반엔 몰입이 조금 힘들었으나
심플한 무대, 신선한 주제, 좋은 배우들의 연기 탓이었을까.
점점 나는 연옥의 캐릭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 충분히 이해해 주고 싶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정민과의 관계를 떠나, 그녀의 모습 그 자체에 말이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들과 비슷한, 우정과 애정사이의 애매한 관계의 친구가 있어봐서 였을까.
무슨 얘기든 시작했다 하면 몇 시간씩 시간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기도 하고,
경쟁 상대이기도 했고, 동료이기도 했고, 가끔은 연인이기도 했던,
이해하는 만큼 불만도 많았고, 의견충돌도 많았고, 오해도 있었고,
그러다 결정적 순간엔 서로 뒤를 돌아버린...^^ 그런 친구 말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 그의 진심을 알고 나는 기가 막혀 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다고 자부하던 나 역시 바보같긴 마찬가지 였으니
그저 우린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고 웃을 수 밖에...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의미를 서로 다른 언어로 얘기한다고 한다.
표현의 방법이 그만큼 다르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력일 수가 있는 것이고
내가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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