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의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펜데믹 시기에 사람들은 실제 여행을 대신할 수 있는 가상현실 여행을 개발했고
그 세계에서는 가상의 캐릭터(아바타)가 실제 현실의 여행객과 함께 걷는다.
이런 전제하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실제 그곳을 걷는 사람들과 나의 게임 아바타가 공존하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보통 스페인의 동쪽(혹은 프랑스)에서 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끝나는데
한 사람이 순례길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온라인 상에서도 발견된 이 사람의 기이한 행적을 따라가는 "시베리아 순례길"이 생겼고
그 길을 따라 가는 온라인 유저들도 생겼단다.
그리고 시베리아 극동부의 오호츠크 해상에 위치한 '기후탐사선' 위성분석 레이더실의 두 연구원은
시베리아 벌판을 걸어가고 있는 그 여행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 왜 그 길을 계속해서 걷는지 궁금해하고 걱정도 한다.
무대는 매우 심플하게 긴 사다리꼴 형태의 테이블과 간혹 흐릿한 영상을 비춰주는 흰 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테이블은 가만 보면 시계바늘 모양이고, 배우들에 의해 회전하며 각을 바꾼다.
아마도 제한된 공간 안에서의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듯하다.
테이블에서 의자도 나오고 컴퓨터도 나오고 한다.
두 사람은 관찰된 여행자를 주제로 이런저런 큰 의미없는 대화들을 주고받는데
그러는 사이사이 쉴 새 없이 암전이 거듭된다.
한번의 암전은 글의 한 단락과 같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때론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연극은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러시아의 마가단에 이르는,
유럽의 서쪽 끝에서 러시아 동부에 이르는 세계지도와 도로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극의 내용을 따라서 확인해 보니......
스페인에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을 지나
바이칼호 부근(?)의 이르크츠크를 지나 야쿠츠크까지는 차를 타고 왔고
야쿠츠크에서 콜리마 대로를 따가 마가단으로 걷고 있다고 하는데... (마가단이 이 도로의 끝이니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순례자. 그것도 혹한의 시베리아 대륙을.
그가, 혹은 그녀가 정말 순례를 하는 것인지, 왜 그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끔씩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그리고 그의 대사는 모호하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럭키'라고 부르는 대상이 그의 개였던 것 같은데
마가단까지 와서 오호츠크 바다에 몸을 던지겠다는 얘기 같기도 하고...
('나를 그냥 여기 두고 가는거야' 라는 대사)
긴 여행길의 동반자를 사람이 아닌 '개' 로 설정한 이유가 철저히 혼자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차라리 그냥 끝까지 대사가 없이 모호한 채로 끝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프로그램북의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순례길을 걷는 이유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자기성찰, 자기환기'라고 한다.
그 다음이 '현지체험'과 '호기심'이고
"성지순례"의 가장 큰 목적인 '신앙사교' 항목이 다섯번째다.
길을 걸으며,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좋은 일이지.
이야기에 나오는 도시들을 검색해 보았다.
이르츠크츠는 한때 유형지였는데 이르쿠츠크에 온 죄수들은 러시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유럽의 영향을 받아 각성한 귀족은 물론 폴란드 반란세력,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야츠쿠츠는 러시아 내에서도 교통이 좋지 않은 곳이며 겨울이면 추위로 유명한 지역이다.
극지방으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극심하다.
하지 때는 2시 30분에 해가 떠서 22시 30분에 해가 진다. 낮 시간이 무려 20시간에 달하는 것.
물론 겨울에는 당연히 이와 반대여서 해가 하루종일 4시간밖에 안 떠 있다.
콜리마 대로는 1940년부터 5년간 진행된 공사에 연인원 70여만명이 투입됐고,
2만7000명이 사망해 이 길을 ‘뼈 위의 도로’로 부르기도 한다.
도로 공사 중 죽은 사람들을 도로에 그대로 묻었다고 한다.
마가단에는 "슬픔의 가면"이라는 콘크리트 조각상이 있는데
1930년 초반, 콜리마 산맥 부근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자
콜리마 '굴라크'(수용시설)에 있었던 죄수들을 동원해 채굴 작업을 하다가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콜리마 대로 덕분에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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