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극단의, 지난번과 다른 버전의 <맥베스>를 관람.
내용은 고전극인데 보여지는 무대는 매우 현대적이다.
숲도 되고 의자나 테이블, 침대도 될 수 있고, 관도 될 수 있고, 기둥이나 담벼락도 될 수 있는 직육면체의 상자들.
그리고 욕망의 싱징인 듯 선명하게 붉고 높은 계단.
군인들은 현대전의 전투복을 입었는데 마녀들? 은 마치 소리뿐인 존재들인 것처럼 숲과 하나된 모습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과연 비극인가, 아니면 악인열전인가.
비극의 발단은 예언에서 시작한다. 맥베스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내가 새로운 영주가 되고, 왕이 된다고?
애초엔 그럴 생각이 없었을, 충직한 신하이자 장군이었던 그의 마음 속에 예언의 말이 욕망의 싹을 틔운다.
처음의 그것은 그저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왕위를 찬탈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내는 달랐다.
덩컨왕은 왜 맥베스를 굳이 찾아왔을까?
덩컨은 맥베스를 믿었지만 승전의 주인공이 된 그를 한편으로는 견제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왕의 자비를 보여주는 한편 자신의 아들인 맬컴왕자를 후계자로 세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두려고 한 것이다. 딴 맘 먹지 마라.
그러나 모든 왕위는 권력의 최정점인 동시에 욕망의 최정점인 법.
망설이는 맥베스를 부추기는 또 다른 마녀, 레이디 맥베스.
그녀는 맥베스의 욕망에, 그 작은 싹에 부채질하여 불을 붙인다.
일단 붙은 불은 결국 그녀도, 그도 다 태워버릴 것을.
어차피 왕이 된다는데, 좀 기다릴 수는 없었나?
처음에는 아내에게 등떠밀려 칼을 잡은 듯이 보였던 맥베스는
일단 덩컨왕을 죽인 후에는 거침없이 정적들을 죽이게 된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처럼, 눈앞의 모든 정적과 그들의 씨앗마저 무자비하게.
맥베스는 끝까지 반성하거나 후회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맥베스가 계속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왕위를 굳건히 하기 위함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한 짓을 누군가 내게도 할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
내가 한 일을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그저 나약한 인간의 자기방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선제공격?
악으로 시작한 일은 정말 악으로 끝내야 하는가?
아니지, 악으로 시작한 일은 악으로 되갚음을 받게 마련이지.
마녀들이 첫 예언을 하면서 "그렇다고 해도 덩컨 왕을 죽이지는 마"라고 친절하게 얘기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알듯 모를 듯 모호한 말로 그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켜 놓기만 해 버렸다.
두 번째 예언을 들으러 맥베스가 다시 마녀들을 찾았을 때는 그래도 구체적으로 알려 주던데.
아, 그 두번째 예언은 좀 아니었다고 본다...
이게, 고전이라고 하는, 그것도 세익스피어라고 하는 이름에 가려져서 그렇지,
무속의 모호한 예언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결국 뜻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뿐.
결국 마녀들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맥베스의 내면에 잠재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었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처음에는 악녀의 모습이었던 레이디 맥베스는 점점 불면에 시달리게 되면서 괴로워한다. 양심? 가책?
그래, 사람을, 더구나 왕을 죽이게 하고 맘 편하게 잠을 잔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지 싶으면서도
감정이입이 되진 않았다. 이 캐릭터 뭐야?
아이가 없는 그녀가 벤코우의 아이를 죽이려는 맥베스에게 "꼭 아이까지 죽여야 해?"라고 말하는 대목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것이 맥베스와 그녀의 입장차이라고 보여진다.
맥베스는 직접 칼을 쥔 자다. 직접 칼로 살인을 했고 살인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죄의 무게로 본다면 맥베스가 훨씬 크다. 그만큼 맥베스의 두려움은 그의 아내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그 공포를 없애기 위해 다가오는 모든 위협에 그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른 것이다.
아마도, 맨 처음 자신에게 살인을 사주한 아내에게 깊은 원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사주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덩컨 왕의 피가 묻은 그녀의 손은
비로소 자신이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며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가져왔을 것이고
그녀는 그 피의 무게를 이길 정도의 강한 멘탈을 갖진 못한 것이다.
쟁취의 기쁨은 순간일 뿐, 원혼들을 마주할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은 그 댓가였다.
불면은 매우 중요한 장치로 여겨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모든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죄를 지으면 편한 잠을 잘 수 없고, 죄를 덮기 위해선 더 큰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
전박찬의 맥베스. 매우 강렬했다.
소년같은 이미지의 배역으로만 보다가 이런 역으로 보니 좀 낮설기도 하다.
배역의 캐릭터나 극의 내용, 무대 분위기 모두 시종 무거웠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들었던 듯하다.
포스터의 사진이 그라는 것이 다시 보아도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싯점, 그러니까 2022년 11월 대한민국의 싯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런 정극보다는 지난번 보았던 떼아뜨르 봄날의 조금은 풍자스러운 맥베스가 더 맞는 해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https://lucill.tistory.com/entry/%EB%A7%A5%EB%B2%A0%EC%8A%A4-20220428
'관람후기 >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저리 - 20221228 (2) | 2023.01.03 |
---|---|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 20221109 (0) | 2022.11.14 |
세인트 조앤 - 20221014 (0) | 2022.10.20 |
오만과 편견 - 20220831 (0) | 2022.09.19 |
햄 릿 - 20220727 (0) | 2022.07.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