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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tory/My Story

눈물

by lucill-oz 201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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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내 감정이 너무나 메마른 것이 아닌가를 의심할 만큼 눈물이 없었다.

분명 가슴에서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언제나 눈은 건조했었다.

(아마도 나의 안구 건조증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보다)

심지어, 울고싶어 죽겠을 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돌이켜보건대...눈물이 말랐던 그 시절에는 감정의 몰입도 잘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뜨거운 애정을 받아도 그저 덤덤할 뿐.

때로는 그와 나의 관계를 아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도 있었다.

유체이탈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에게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때로는 내가 그에게 빠져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나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운명을 느낀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때에도 내 눈물은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감수성이 풍부한 나의 파트너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나는 그런 그남자의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곤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툭하면 눈물이 나오곤 한다.

TV를 보다가도 약간의 감동코드만 나와주면 어김없이!

영화를 보다가도! (물론 나만 눈물을 흘리는것은 아니지만, 안 그러다가 갑자기 그러니까)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내 감수성이 갑자기 대폭발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그냥 나이 탓인건가?

 

우리 아버지는 사실 감성적인 분이셨다.

젊은 시절, 양 어깨에 얹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표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버진 음악을 좋아하셨고, 자연을 사랑하셨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집엔 전축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우리 형제들의 음악적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집에 비발디의 "사계"가 있었다는 것을 고등학교 2학년 때에야 알았지만

아버지는 그 옛날에 클래식 음악도 즐겨 들으셨던 분이셨다.

(나는 그당시 문주란의 '내 몫까지 살아주"라는 노래를 좋아했었다.

 그 때가 대여섯살 정도였었던 것 같은데...지금 생각해보니 좀 웃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동네 여기저기를 산책하던 어린시절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아카시아 꽃을 따먹기도 하고, 풀이름, 꽃이름도 가르쳐 주시고...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명주고름"처럼 부드러웠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그물을 직접 만드실 줄도 아는 분이셨다.

한달씩이나 걸려서 직접 실로 짠 그물에 납을 녹여서 동일한 무게와 모양으로 만들어 그물 끝에 달아주면

멋진 그물이 탄생한다.

아버진 그 그물을 가지고 우리들을 데리고 저수지나 개천가로 고기를 잡으러 다니셨다.

내 기억에는 나를 가장 자주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이전엔 오빠들이랑 더 많이 다니셨었는지는...

그물을 던지는 순간, 둥그렇게 펴지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는 재미로

나는 즐겨 아버지를 따라다녔던가.

 

여름철, 소나기가 내리고 나면 아버진 내 손을 잡고 산으로 가셨다. 버섯따러...^^

정말 신기한 것이, 비를 맞고 나면 나무 밑둥의 버섯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올라온다.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여러 종류의 버섯들이 생각난다.

작고 노란색의 꾀꼬리 버섯, 메추리알처럼 동그란 알버섯 등등...

이것저것 잔뜩 따가지고 집으로 가면 엄마는 질색을 하셨다.

바지에는 온통 풀물이 들어 시퍼렇고, 반바지를 입고 간 날에는 온통 풀에 베인 상처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엄마는 당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종류 이외에는 다 버리셨다.

잘못 먹으면 큰일 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괜찮은 것인데 왜 버리냐고 하시고...^^

 

겨울이 되면 화단에서 키우던 화초들이 전부 화분에 담겨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아버지가 아끼시던 것들이다. 선인장, 문주란...

아, 그 문주란은 우리 올케언니가 지금도 소중히 돌본 덕에 올해도 꽃을 피웠었다.

엄마는 집안도 좁은데 화초들은 왜 집안으로 끌고 들어오냐고 싫어하시고

아버진 그래도 겨우내 그 친구들을 가꾸고 바라보시며 즐기셨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삶의 무게가 무거운 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사셨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가 꽤 오랫동안 일기를 쓰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신 돌아가실 때 자식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열심히 쓰셨다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아버지가 그것들을 불에 태우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당시에 나는 그게 뭔지 몰랐고, 아버지 얼굴이 어두우셨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 날,아니 그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나중에 엄마에게 여쭤봐야겠다. 엄마는 알고 계시니까......

 

눈물 얘기를 하다가 아버지 얘기가 길어진 것은...

그런 아버지가 연로해지시면서 눈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말을 꺼내시다가도 울컥 눈물이 나서 말을 잇지 못하셨고,

어느 날은 그저 생각만으로도 목이 메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신 날도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이 슬프기도 했었다.

 

엄마는 늘 '너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셨다. 빼다 박았다고 ^^

대개의 경우, 엄마들이 '넌 네 아버지를 닮았다'라고 하시는 경우는

남편의 '맘에 안드는 부분'을 자식들이 꼭 닮았을 때이다.^^

(나 역시 겪어보니 자연이 알게된 진리에 해당하는 말이다) 

어렸을 적에도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난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점점 더, 부정할 수 없는 유전자의 증거들이 드러나니까...^^

이제는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난 아버지의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 받았음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에게서는 할머니의 얼굴이 나왔었다.

몇년 전, 오랫만에 만난 큰고모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아버지가 앉아계신 줄 알았었다.

그리고 요즘, 큰오빠를 보면 아버지 모습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랑 큰고모는 할머니를 닮았고, 나랑 큰오빠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나는 아마...아버지처럼 늙어갈 것이다.

이젠 늙음을, 노화를, 때론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슬프게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이다.

 

내 눈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시도때도 없이 다가오는 감동의 시간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노화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마도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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