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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연극

비너스 인 퍼 - 20170812

by lucill-oz 2017.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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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그것도 1열 정중앙의 양도받은 행운!!


패션쑈의 스테이지처럼 공간의 정중앙에 설치된 무대, 무대를 중심으로 양 쪽으로 배치된 객석.

무대 양 끝에 걸린 거울이 인상적이다.

한 쪽 거울 앞엔 소파가, 반대 쪽 거울 앞엔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다.

책상이 놓여진 곳은 토마스가 지배하는 공간이고 소파가 놓여진 곳은 벤다가 지배하는 곳이다.

자신이 각색한 연극 '비너스 인 퍼'의 여주인공을 찾기 위한 오디션에서 마음에 드는 여배우를 만나지 못한 토마스는

약혼녀와 통화를 하며 오디션에 왔던 여배우들에 대한 불만이 대단하다.

그의 말투를 보면 웬지 여배우들에 대한 경멸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듯 하다.

어쩌면 그것으로 연출가라는 자신의 지위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것인지도.

그런 그가 약혼녀에게는 깍듯한 말투다. 심지어 경어를 쓰기도 한다. 혹시 그는 그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일까?


오디션 끝난지 삼십분도 더 지난 시각에 비에 젖은, 여주인공과 실제 이름이 같은 벤다, 그녀가 쳐들어온다. 

그녀는 무례해보이고, 막무가내이고, 무식해보이기도 한다.

토마스는 오디션을 보지 않고 그녀를 보내려 하지만, 너무도 수선스럽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하는, 

그러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그녀에게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대본리딩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연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완벽한 18세기의 벤다 두나예브로 변신한다.

3페이지까지만 하자던 리딩은 점점 늘어나 마지막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벤다가 보여주는 장악력은 정말 대단하다.

연출자인 토마스를 상대역으로 세우고 대사를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를 배우로 만들어버리는데

토마스는 어느 새 최면이라도 걸린 듯 그녀가 이끄는 대로 연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사를 해석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해서 토마스를 당황시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와의 오디션을 끝내지 않는 이유는

허를 찌르는 듯한 그녀의 지적과 동시에 점점 더 완벽하게 벤다가 되어 쿠셈스키가 된 자신을 지배하는 그녀의 힘이다.

이미 여주인공 벤다 두나예브 역을 그녀에게 확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연출로서 배우에게 디렉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자신이 어느새 벤다의 지시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중간중간 서로의 연인과 통화를 하는 장면은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데

토마스는 매우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처음에는 기획사 대표랑 통화하는 줄!) 얘기하는데 반해

벤다는 그들이 연인사이인가 싶을 정도로 매우 거친 말투를 쓴다. (사실 벤다는 혼자 연기를 하고 있다.) 

이는 마치 벤다가 토마스를 경멸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듯 하다.

결국 마지막 씬에서는 원작에서처럼 토마스를 책상에 묶어 두고 벤다가 그대로 퇴장해 버리는데,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둘 사이의 힘의 비율이 1대 100으로 토마스가 우세했다면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 힘은 마치 시소가 기울듯이 점차 벤다 쪽으로 쏠리게 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벤다가 그 힘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몽땅 다 탈탈 털어서 유유히 떠나는 듯한 느낌이다.

커튼콜 때 벤다가 웃으면서 등장하여 인사를 하는 중간에도 토마스는 책상에 양 팔이 묶인 채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당신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인가 싶다.

(스타킹으로 묶은 것이니까 혼자 빼려고 하면 할 수도 있었을텐데... 싶었다^^)


지현준이라는 배우를 무대에서 본 것은 처음인데 목소리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이 저음이었다.

젊고 섹시한 이경미 배우 역시 처음이었는데 (뮤지컬 배우 이경미랑 동명이인)

벤다라는 역할의 캐릭터가 맛깔나게 연기하기 쉽진 않아보였는데 참 능청스럽게 잘 한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남남 2인극이나 여여2인극은 봤었는데 남녀 2인극을 본 것은 처음인가 싶다.

역시 2인극은 두 배우간의 주고받는 에너지의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잠시라도 긴장감이 늘어지면 지루해질 수가 있으니까.

이 연극은 그런 긴장감에 더해 곳곳에 웃음이 터져나올 수 있는 코메디적인 요소도 있고

대사의 억양이 마치 고전극을 보는 듯 하기도 하고 (18세기 때의 이야기니까)

SM이라는 소재를(토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지만) 어느 정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벤다가 처음은 비굴하게 시작했지만 최후에는 토마스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여성 관객들에게 쾌감을 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좋은 관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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