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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전시

시대를 보는 눈 : 한국근현대미술 - 20220830

by lucill-oz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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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정원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이 장면을 보고 홀린듯 방향을 틀었다.

아쉽게도 3층 5,6 전시실의 전시는 끝나고 (1900년대 초 ~ 1970년대까지)

중앙 통로에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의 작품에서 시작하여

2층 3,4 전시실만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 현재)

그래도 덕분에 내가 살아온 시대의 미술사를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주 우연하게도.

어쩌면 한번은 본 적도 있고,  어쩌다 한번은 들어본 적 있는 이름들을 만나며

아, 이 때가 그때 쯤이었구나 하며 하나하나 유심히 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시대별로 미술그룹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의 대표작들을 보여주는데

모든 분야가 그렇듯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며 현재에 이르렀음이 한눈에 보였다.

흥미로운 작품들은 작가와 작품명을 찍어서 찾아보고 기억해 보고자 한다. 

 

김홍주 작 <문>

마치 사진을 방불케 하는 세밀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순간을 포착한다는 면에서는 사진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과정의 수고로움이라고 할까 그런 게 느껴져서...

저 여인은, 또 여인을 닮은 듯 보이는 저 아이는 무얼 쳐다보는걸까. 어딘가 쨰려보는 것도 같고.

보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첫 부분부터 강렬한 느낌이었다.

수묵화가 떠올리게 하는 여백과 실사감의 익숙한 그림이 아니라

'먹'이라는 동양적 소재를 사용한 서양적 개념의 추상 수묵화부터였으니까.

그 당시, 미술계의 젊은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은 다양한 시도들을 했구나.

아, 묵림회는 한국 미술사에 큰 의미를 남겼구나. 

 

서세옥 작 <사람들> 1988년작

현장에서 사진을 안찍었더니 좋은 이미지가 없었는데 마침 유튜브에서 전시해설을 해 주어서 급하게 휴대폰으로 찍었다.

 

서세옥 작 <춤추는 사람들> 1989년

이 분의 작품세계는 매우 흥미롭다. 서양화 느낌의 동양화?

대상을 지극히 간략화하면서 먹의 농담과 붓터치의 두께차이로 인한 원근감도 느껴지고

무엇보다도 사방연속의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임에도 그 대상이 모두 다른 형태로 그려져 매우 자유로와 보인다.

 

정탁영 작 <잊혀진 것들>

화폭을 접은 선도 보이고 먹바탕 아래 푸른 밑칠도 보인다.

수묵화가 단지 '붓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다'라는

수채화와는 또 다른 오직 묵과 물과 한지가 만났을 때 보여줄 수 있는 느낌의 영역확장?

 

오숙환 작 <휴식>

이건... 고층 아파트? 혹은 호텔의 객실 같은데서 야경을 바라보며 한 잔 하고 있는 듯한 느낌?

 

황창배 작 <20-2>

뭐라고 한 마다로 표현하기 어려운 몽환적 느낌이다.

가운데 머리 긴 여자를 중심으로 우측은 밝고 좌측은 어둡다.

가는 붓선이 예리하게 느껴져서인지 동양화라는 느낌이 별로 안 든다.

 

권영우 작 <무제> 1985년

"무제"라는 제목은 관람자로 하여금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준다.

보통 한 눈에 작가의 의도가 들어오지 않을 때 제목은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어준다.

그런데 제목이 없는 것이 제목이면 뭘 느끼라는 거지? 싶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때론 그냥 보이는 대로 느끼면 되는구나 싶어 편안하게 지나갈 수 있게도 된다.

작가의 의도가 뭐가 되었든, 작품이 대중의 눈앞에 보여진 이상 느낌은 감상자의 몫이니까. 난 평가자가 아니니까.

 

 

묵림회의 전시 팜플릿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팜플릿의 글씨체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1964년이다.

지금으로 보면 촌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 눈에는 레터링 디자인과 편집 레이아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들 출발했겠구나... 

지금이야 참고할 자료가 지천이지만 디자인산업 초기엔 종이 쪼가리 하나도 귀중한 자료였다.

외국 서적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잡지와 포장지의 레터링을 오려 모아 스크랩하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니 이정도 디자인도 꽤 획기적이지 않았을까.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민중미술이란, 그 명칭은 몰라도 그림들은 매우 익숙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학가나 노동계의 시위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니까.

무언가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와 터치. 그리고 판화 작품들.

예술이 혼자서 고고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불의를 고발하고 힘없는 민중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신학철 작 <한국근대사 - 금강>

조선말 동학운동에서부터 80년대 민주화 운동까지, 격동의 민중투쟁사를 보여준다.

제일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마치 거대권력과 줄다라기를 하듯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준 고비의 순간.

 

주재환 작 <원왕생>

19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달력에 메모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 한달간 수많은 학생과 노동운동가들이 열사가 되었고 위 사진의 박창수 위원장 사건은 내 기억에도 뚜렷하다. 

내가 살던 안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엔 신문이나 방송에서 크게 다뤄주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한겨레신문이니까 이런 사진이 나왔으리라.

 

오윤 작 <원귀도>

작품 길이가 너무 길어 사진을 찍어도 일부만 나오는지라 MMCA 페이지에 가서 모셔옴.

좌측에서 우측으로 갈수록 색과 형태가 선명해진다. 내가 잘 모르던 시절에도, 내 기억에 없는 일들이라 해도 민중의 수난사는 언제나 있어왔다. 굳이 어느 시대 어느 장면이라고 일러주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들의 아픔은 더 오른 쪽에 우리의 현재로 이어지리라.

 

 

최민화 작 <검악>

이 그림은 슬픔보다도 힘과 결기가 느껴진다. 선명한 붉은 색, 숲속에 몸을 숨기고 돌격명령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다.

그림의 오른쪽은 색도 선명하고 터치도 힘있게 느껴진다. 반면 좌측은 단색조에 멀리 보이는 사람들도 아련해보인다.

 

김준권 작 <통일대원도>

남과 북이 한반도의 허리에서 만나 서로를 부둥켜 안다. 강렬하다.

 

이른바 '여류' 예술가들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대중음악의 부흥기에 이런저런 보이그룹 걸그룹 혼성그룹이 명멸하던 모습가 생각난다.

때론 이 팀이 깨지면 또다른 멤버와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고 솔로독립을 하기도 하고

최근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기도 하고 그룹 내 유닛그룹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흔적의 결과가 역사의 한 장으로 남는 것이다.

 

강익중 작 <삼라만상>
박이소 작 <프라이드 시리즈> 1993년

프라이드, 뉴 프라이드, 수퍼 프라이드, 울트라 프라이드, 다음이 뭔지 잘 안보이네.

탁구 전성기에 탁구를 통해 국민적 프라이드가 점점 높아져 가는 것을 표현. 재미있는 발상이다.

프라이드가 높아질수록 탁구대의 위치도 한 단계씩 올라간다. 

 

박이소 작&nbsp; <어니스트>

 

많은 작품들 중에서 가장 톡특한 작품이었다.

스피커에서는 위의 내용에 충실하게 부르는 노래 어니스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남준 작
백남준 작 <색동>
누구의 작품인지 기억나지 않으나 꽤 인상적이었던 작품의 일부. 하루 종일이라도 보고 있을 수 있겠다.
손동원 작 <문자도 코카콜라>
이동기 작 <국수를 먹는 아토마우스>

아토마우스는 아톰의 머리와 미키마우스의 몸을 가진 캐릭터이고 여러 시리즈 작품이 있다고 한다.

 

홍경택 작 <훵케스트라 (FUNK + ORCHESTRA)>

 

한 학기 분량의 미술사 수업을 두 시간에 압축해 놓은 듯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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