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평론가 강헌 선생의 벙커1 강의에서 소개된 영화를 몇편 보았다.
정비석 원작의 자유부인은 물경 1956년 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수작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싯점인 당시에 불어닥친 자유의 바람,
여성들의 의식의 변환, 그리고 일명 춤바람! 여러가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오선영은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친정올케의 소개로 양품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남편은 '그래도 대학교수의 부인인데 양품점 점원이 뭐냐'며 마뜩잖은 기색을 보이나
거듭되는 아내의 채근에 결국 허락하고 만다.
오빠의 집으로 가던 중 친구 최윤주를 만나 갑자기 '명사부인의 모임'에 대학교수 부인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된 선영.
요즘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여인들은 음식점 룸을 빌려서 자유연애를 노래하고 술과 담배를 즐긴다.
2차로 댄스파티에 가자는 것을 마다하고 나오지만 내심 호기심이 생긴다.
한편 선영의 옆집에 사는 청년 신춘호는 선영에게 호감을 표하고 그런 춘호가 선영도 딱히 싫지는 않다.
그런데 알고보니 춘호는 조카 명옥과 교제하는 사이다.
조카가 그의 훌륭한 댄스 파트너라는 것을 안 선영은 문득 자신도 춤을 배우고 싶어진다.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춤을 가르쳐주겠다며 과감하게 다가서는 춘호.
선영은 양품점에서 일을 하며 주인 내외의 신임을 얻는다.
특히나 바깥주인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마음에 들어하고, 안주인은 그런 남편과 선영을 감시한다.
어느날 양품점에 손님으로 찾아온 무역회사 사장 백광진이 고가의 화장품을 사며 그녀에게 호의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현재 사업부진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상태다.
그런 그에게 선영의 친구 윤주가 동업을 제안하고, 급전이 필요한 그는 거짓 사업제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인다.
계를 조직한 윤주는 선영에게도 한구좌 들 것을 권유하며 선영을 설득한다.
여성이 남편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경제력의 독립이 필수적이라며
남은 인생을 enjoy하려면 돈을 모아야 한다는 윤주의 명대사!
선영으로선 놀랄 소리를 한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옆집 춘호를 찾아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선영의 남편 장교수는 옛 제자 은미의 부탁으로 타이피스트들에게 퇴근 후 한글을 가르치게 되고
그러면서 점차 은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낀다.
양품점 사장은 자신의 가게에서 선물을 사서 선영에게 선물을 하는 등 선영에게 호의를 보이고
함께 식사를 하려다가 안주인에게 딱 들키고 만다.
한편 선영의 조카와 만나고 있으면서 몰래 선영에게 전화해 실전연습을 핑계로 댄스홀에 가자는 춘호.
함께 오페라 구경을 가자는 명옥을 거짓으로 따돌리고 과감한 양다리플레이를 구사한다.
이리저리 남성들의 유혹을 받는 선영.
처음으로 찾은 댄스홀을 경험하던 중 다른 남자와 들어온 명옥과 부딪친다.
또 그 와중에 당황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명옥에게 춤을 청하는 춘호.
이녀석은 대학생이라는데 아주 능숙한 제비다!
그 사이 선영의 앞으로 다가온 양품점 주인!!
무역회사의 백광진은 채무자에게 시달리고 있다.
그곳에 구세주처럼 곗돈을 들고 찾아온 윤주.
채무자는 상황을 파악했지만 자기가 받을 돈을 챙기기 위해서 모른척 돈을 들고 사라진다.
선영의 양품점에서 외상으로 핸드백을 가져온 백광진에게 선영이 독촉전화를 하고
백광진은 그 가방을 윤주에게 선물한다.
선영은 이제 한복을 벗고 양장 차림을 하고 있다.
선영을 찾아온 윤주는 달라진 선영의 모습을 보며 놀란다.
선영에게 2차 댄스파티에 꼭 나오라며 단, 파트너는 절대 남편은 안된다는 조건이란다.
그 말에 선영은 자신을 만나러 온 양품점 주인에게 댄스파티의 파트너로 신청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저녁에 댄스홀에 갈 것을 약속하는 두 사람.
점점 과감해지는 선영.
댄스홀에는 윤주와 백광진이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윤주를 유혹하는 백광진에게 확실히 온천장(!!)에 가자고 말하라는 윤주.
파트너(!)와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던 거리에서 선영은 뜻밖에 은미와 함께 걸어오는 남편을 맞딱뜨린다.
함께 집으로 들어온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은 후 선영은 자켓만 갈아입은 채 고무신을 끌고 옆집의 춘호를 찾는다.
위스키를 한 잔 하고 춘호의 유혹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어린 아들이 들이닥친다.
한글 수업이 끝나는 날, 은미는 장교수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하며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한다.
선영이 가정에 소홀한 동안 은미에게 위로를 받았던 장교수는 그런 은미가 애처롭다.
윤주는 백광진의 부탁으로 선영에게 돈을 꾸어가고,
며칠 뒤 외국으로 나간다는 춘호와 송별회를 하자며 다방에서 만나기로 한 선영.
그러나 춘호는 거짓말로 그녀를 따돌리려 하고 그곳엔 이미 명옥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자신이 농락당했다며 분노하는 선영에게 춘호는 되려 당신은 남편이 있는 몸이니 나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자신이 선영에게 이용당한 것이라 말하며 당당히 명옥에게 돌아가는 춘호.
몹시 화가 나 집에 온 선영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늦게 들어 온 남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은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그리 떳떳치는 못하기에 아무 말 못하고 당하는 남편.
그러나 장교수에게 선영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 통이 전해진다.
양품점의 여주인이 점원을 시켜 늘 선영과 남편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
백광진은 결국 부도를 내고 경찰서에 잡혀간다.
윤주는 돈을 날린 것은 둘째치고 명사의 부인이 그와 외도한 일이 드러나며 막다른 궁지에 몰린다.
댄스파티에 가기로 한 날, 출장에서 돌아오는대로 선영에게 오겠다던 양품점 사장은 마중나온 아내를 겨우 따돌리고
늦게야 나타나서는 댄스 파트너가 아닌 애인이 되어달라고 하고 선영은 그러마고 한다.
그들은 댄스파티에 참석하는 대신 두 사람만의 파티를 하자며 여관(?)으로 향하고
그 시간 파티장에서는 오늘 순번에 주어야 할 곗돈을 마련하지 못한 윤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춤을 춘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괴로움으로 극단의 선택을 하고 만다.
약을 술에 타서 마시고 춤을 추다가 쓰러져 죽는 극적인 장면.
양품점 여주인으로부터 댄스파티장으로 오라는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장교수는 차마 그곳으로 갈 수가 없다.
결정적 순간에 여관으로 들이닥친 안주인에게 호되게 뺨을 맞고 뛰쳐나온 선영.
밤길을 터벅이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마 대문을 들어설 수가 없다.
그 때 대문밖으로 나온 남편은 교수답게 품위있고 따끔한 말로 아내의 행실을 꾸짖으며 선영을 내친다.
그러나 아들의 간청을 못이기며 아내를 용서하는 남편.
아들을 끌어안고 참회하는 선영.
영화를 보며 나는 1950년대를 아주 오래 전으로 오해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물론 필름이야 어둡고 칙칙하지만 그건 기술적인 문제이고
일제시대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된 때였으니 아직 유교적인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을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지식인들을 휩쓴 모더니즘이라던가, 전쟁 후 미국의 영향으로 불어닥친 새로운 사상과 문화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을 만한 충분한 배경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소설이 발표될 당시 엄청난 이슈를 몰고 왔었다는 것을 이미 학창시절 수업시간을 통해서도 들어 봤지만
2017년이라는 이 싯점에 보아도 이 영화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신선하고 세련되었다는 느낌이다.
여주인공의 이름도 선영, 윤주다. 요즘 이름이다. 미자, 순옥 등 정겨운 이름이 아니다.
영화는 소설을 비주얼로 보여주기에 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문물, 그 구체적 현상과 물건들을 통해서 말이다.
옆집 청년 춘호는 단칸방에 살지만 축음기로 매일 밤 음악을 듣고 위스키를 마신다.
카메라로 선영의 모습을 찍어주기도 한다. 춤은 필살기다.
어설픈 영어를 구사하며 전후 신문물을 동경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윤주는 또 어떤가!
부유층 아녀자의 세련미와 아울러 퇴폐적(?)인 모습도 있고, '백만원'이라는 액수로 대변되는 다소간의 경제력도 있다.
남편들이 안팎(!)으로 사업에 바쁘니 아녀자들 또한 그리 못할 것이 무엇이겠냐는 의식.
남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경제력이 필수라는, 여인들의 주체적인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그녀는 멋지다.
선영은 그저 교수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지키며 조신히 살림만 하던 여인이었으나
직업을 갖게 되면서부터 능숙하게 손님을 대하는 장사수완을 보이기도 하고
너무나도 개방적인 주위의 문화에 쉽게 흡수되며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두 여인 다 결론이 너무나 뻔하니까 그점이 좀 아쉽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저 시대적인 사고 환경의 차이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굉장히 파격적인 내용을 다뤘으면서도 결론은 선영의 경우처럼 여자는 밖으로 내돌리면 안된다든가
아니면 윤주의 경우처럼 여자가 너무 나대면 안된다던가 하는 식의 결론을 내렸을 것이 뻔하지 않았겠는가.
자유부인인데, 끝까지 좀 멋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장소적 배경이 또한 그렇다.
지금 보아도 어딘지 알 수 있는 시청과 덕수궁 앞 도로는 옛 모습이지만
선영의 오빠 집의 거실, 양품점의 유리 진열장, ' 25시'라는 다방 이름, 특히 댄스홀과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난 아마도 그 당시에는 인테리어라는 개념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요즘에도 가끔 쓰는 디테일이 보여서 깜짝 놀랐다.)
댄스홀 무희의 선정적이고 과감한 춤과 의상, 상체가 많이 드러난 댄스파티 드레스 의상 등
목소리 더빙이 요즘 말투나 억양이랑 좀 달라서 그렇지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연출 모두 훌륭하다고 느꼈다.
정말 오랫만에 더빙영화를 보며 그시절의 말투를 듣다보니 여인들의 새침함과 남성들의 느끼함이 동시에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너 애인있지?'라는 윤주의 질문에 묘한 웃음으로 '망할것!'이라고 대꾸하는 선영의 오디오는 오히려
적당히 요염함과 내숭을 드러내 주는 것이 매력있었다.
'이봐, 선영이!' 라든가 '오랫만이야, 윤주!'라는, 약간은 아메리카 스타일의 냄새도 좀 나는 호칭도 재밌고
'마담', 혹은 '선생님'(요즘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느낌으로) 이라는 호칭도 정말 오랫만에 들어본다.
여러가지로 느낌이 많은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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