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시즌 보았던 낭독극 중에서 가장 좋았던 느낌이다.
생존이라는 주제로 세 개의 이야기를 한 작품으로 엮었다.
<1부, 나 여기 있숩니다>
정수만의 집에는 김이중, 콩고인 깡땡, 여자가 세들어 살고 있다.
정수만은 지난 몇년간 그의 아내를 뒷바라지하면서 아내의 철없음과 뻔뻔함을 꾹 참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아내가 배신을 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다시 돌아오길 애걸하지만 그녀는 무정하다.
아내와의 마지막 통화를 방해한 옆집 여자에게 한마디 하려고 찾아가지만 그녀는 적반하장에 안하무인이다.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천성인건지 여자에게조차 아무 소리 못하고 오히려 면박만 받고 나온다.
어쩌면 정수만이 여자의 망치소리를 참아내지 않고 그녀를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분노의 표현인 것인데
여자는 그날 이사를 와서 집주인 남자에 대해 뭘 몰랐던 것일까.
그녀 역시 뭔가 내재된 분노가 있어 보인다. 내가 이런데 살 사람이 아니라구!
자신의 분노를 집주인 남자에게 퍼부어 버린다.
이런, 피차 좋지 않은 상황이 부딪쳤다. 여자, 위험해 보인다.
약자의 분노는 대개 다른 엉뚱한 약자에게로 향하게 마련이다.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폭우가 내리던 그날 밤, 정수만은 그간 쌓아온 여러가지 분노를 하나로 싸안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와
그녀를 해치고 벽안에 그녀를 묻어 버린다.
그날 밤, 그의 집은 엄청난 폭풍우에 떠밀려 바다를 건너 어느 무인도로 떠내려 온다.
다행히 정수만이 전쟁을 대비한 비상식량을 넉넉하게 준비해 놓은 덕에 당분간 세사람은 살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김이중이 갑자기 뻔뻔해진다.
굽실거리며 눈치를 봐야할 것 같은데, 이 남자는 웬지 정수만의 성격을 이미 진작에 파악한 것 같다.
이자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니 오히려 더 밀어붙여 내가 더 우위를 차지해야겠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살아남은 사람이 셋밖에 없으니 이제부터 집과 식량은 공동소유라며 정수만의 공간으로 밀고 쳐들어 온다.
여자를 숨겨놓은 벽에 시멘트를 덧바르려고 시멘트에 물을 섞는 정수만에게 김이중이 시비를 건다.
먹을 물도 부족한데 어딜! 당신을 오늘 반만 먹어!
정수만을 도와주려는 깡땡이 벽을 건드리게 되며 허술하게 숨겨진 여자의 시체가 쏟아진다.
정수만은 깡땡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며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도록 하지만 깡땡은 혼란스러워 한다.
정수만은 그간의 모든 불만이 폭발한다. 왜 나한테만 이래!
나 그동안 정말 착하게 살아왔어. 너희들 너무 뻔뻔한거 아니야? 내가 사람 죽였지만 너희들은 죄없어?
깡땡이 말한다. "끝까지 착하지 않으면 착한 것 아닙니다."
그때 정수만의 머리를 내리치는 김이중. 살인자잖아.
만일 정수만이 김이중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다면 끝까지 살아남았을까?
김이중은 깡땡에게 염산으로 시신들을 훼손시키라고 명령한다.
여자까지 우리가 죽였다고 하면 너도 살인자가 되는거야.
김이중은 식량을 혼자 독차지 한다. 깡땡이 조심스럽지만 할 말을 한다.
아저씨만 있는거 아니다, 나도 여기 있다, 나도 사람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먹을 것을 나눠달라!!
그러나 김이중은 깡땡에게 '깜둥이'라며 마치 노예를 대하듯 한다. 니가 무슨 사람이냐는 듯이.
김이중의 악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마실 물도 얼마 안 남았는데 김이중은 실내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로 들어간다. 내가 마실 물은 충분해.
그러자 깡땡은 화장실 문을 막아버리고, 김이중은 화장실 안에서 살려달라 애원하다가 죽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약자에게 일격을 당한 김이중의 최후.
깡땡은 김이중의 시체에 염산을 붓는다. 증거인멸, 배운대로 해야지.
혼자 살아남아 구조된 깡땡. 나머지 사람들의 생사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에게 한국인의 국적이 주어지고 착한 시민상까지 주어진다.
"나, 끝까지 착했습니다" 깡땡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믿기로 한 것 같다.
<2부, 마지막 생존자>
엄청난 홍수. 마치 노아의 방주같은 장화 안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쥐 일가족.
곧 출산을 앞둔 엄마쥐 안젤라와 11 남매. 그리고 무능한 아버지 메튜.
일년치 식량을 다 먹어치운 엄마쥐에게서 대가족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태어난 것은 오직 엄청난 사이즈의 쥐 한마리 뿐이다.
대식가 엄마와 자이언트 아기. 대략난감한 상황이다.
홍수 전 도서관에서 살던 쥐가족은 인간의 언어를 터득했다.
그 중 세째는 엄청난 습득력으로 천재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자랑하다.
실수로 물에 빠진 먹보 엄마쥐를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재빠르게 계산하는 세째.
자식들은 냉정히 엄마를 버린다.
통조림을 구해왔으나 도구가 없어 깡통을 따지 못하자 거대 아기쥐의 앞니를 뽑아 도구로 쓰려는 형제들.
마침 첫째가 구해온 쇠젓가락으로 깡통을 열긴 했지만
통조림을 먹고 더욱 커진 막내를 보고 두려워하는 형제들이 막내를 잡아먹는 안에 대해 논의한다.
첫째는 막내에게 새 잎을 따다 준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너의 형제다.
형제들은 어둠을 틈타 막내를 공격하지만, 막내가 마음만 먹으면야 그까짓 형제들 따위!
그러나 식량이 없어지면 굶어죽으나 찔려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
자신을 해하려는 형제들에게 괴물로 기억되기 싫다며 기꺼이 목을 내미는 막내.
어째, 이미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한 막내의 캐릭터.
그 순간 나타나는 인간들. 막내를 제외한 모든 쥐들이 일제히 장화 안으로 몸을 숨긴다.
장화 속의 쥐떼를 발견한 인간, 기겁을 하며 근처에 있던 염산통을 열어 쥐들이 숨어있던 장화 안에 붓고
다친 막내 쥐를 코알라 쯤으로 알고 구해준다.
생즉필사요, 사즉필생이라.
삶의 아이러니다.
<3부, 노인의 아침>
컨테이너 박스에서 같이 지내는 노인과 소년.
어느 날, 소년이 김치 냉장고를 들고 들어온다. 그 안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시신.
1960년, 답답한 시골구석을 떠나고 싶었던 청년.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한다.
남편은 공장에 취직하고 아내를 호떡장사를 하며 근근한 살림을 이어가지만 철딱서니 없어보이는 남편이다.
젊음이란 다 그렇지. 내가 꿈꾸는 것이 정의다, 꼭 이루어질 것이다 믿지만... 현실은 언제나 무정한 것.
출산이 임박한 아내가 그런 남편에게 말한다. 나, 점점 당신의 희망이 두려워져요...
크리스마스에, 아내는 결국 아이를 낳다가 잘못된 모양이다.
빵 한봉지 사들고 장모를 찾아와 아이를 맡기고 떠나는 청년.
크리스마스에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아이 이름 김지섭 석자를 남기고.
그러나 몇해가 지나도록 지섭의 아버지는 오지 않고,
크리스마스인데 눈도 내리지 않는다.
정거장에서 하염없는 기다림 끝에 버스에 오르는 지섭.
쏟아지는 비.
소년에게 사람을 죽였느냐며 추궁하는 노인. 신고하겠다고 112에 전화를 하는데 죽은 사람이 '아버지'란다.
병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두고 엄마는 집을 나가고
눈빛으로 대화하던 다정한 아버지를 혼자 보내야 했던 소년은
부패해가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쩌지 못하다가 김치냉장고 안에 얼음을 채워 컨테이너로 들고 들어온 것이다.
아버지 이름이 김지섭이라는 말에 순간 놀라는 노인.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박스 테이프를 붙이고 용접을 하여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막기 시작한다.
그토록 찾고 싶던 아들을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쏟아질 듯한 김치냉장고 주변으로 못을 박고 줄을 걸어 고정시킨다.
몇날며칠을 내리던 비가 그치고 드디어 날이 개었다.
노인, 내가 찾던 사람은 나랑 같이 살 여건이 되지 않는다며 소년에게 같이 살 것을 제안한다.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라는 것을 몰랐던 젊은 날에 대한 깊은 회한.
컨테이너 문이 열리면서 빛이 쏟아지듯, 노인에게 그토록 오지 않던 아침이 소년의 모습으로 내려온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만 살아도 깨우칠 수 있다.
그러면 죽음은 뜻대로 되던가.
죽음이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살아남는다는 표현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한계상황이라는 뜻이니까.
삶의 기로에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떤 마지막을 선택할 것인가.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 극단의 외줄 위에서 보여지는 여러 인간들의 유형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
'관람후기 > 연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살인자입니다. - 20190424 (0) | 2019.05.21 |
---|---|
무죽 페스티벌 "세월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 20190417 (0) | 2019.04.26 |
SEARCH WRIGHT 2019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0) | 2019.03.27 |
중국희곡낭독공연 "뽕나무벌 이야기" - 20190317 (0) | 2019.03.19 |
중국희곡낭독공연 "내가 만일 진짜라면" - 20190314 (0) | 2019.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