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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전시

사물에서 사유로(The substantial existnc in ordinary object) - 장호정 개인전

by lucill-oz 201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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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 봉지'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가는 '상황 연출하기', '사진으로 기록하기, '사진 그대로 캔버스에 확대해 그리기'라는 세 단계의 작업을 통해 작품을 형상화 했다. 

무언가를 감싸던 '비닐'은 온전히 '비닐'만 남아 캔버스로 옮겨진다. 

비닐을 통해 사물은 '흔적'만을 남기고 이 흔적 속에서 우리는 '부재'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비닐봉지와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사물의 흔적에 주목한다. 

- 기사글 중에서






오랫만에 나선 인사동 나들이 길에서 우연히 들린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이다.

아주 얇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넣어서 입구를 묶었다가 다시 풀어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낸 후 

그 빈봉지의 형태를 사진을 찍어서 엄청 큰 크기로 확대하여 정교한 터치로 그려낸 작업이었다.

그 작업과정이 얼마나 길고 지루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검거나 푸른 색의 고광택의 배경에 흰색의 물감으로 그려낸 그림의 실사감이란 사진보다 더하다.

차라리 사진을 확대하지 왜 이렇게까지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득

화가는 이 작업과정을 통해서 "흔적"과 "부재를 통한 존재의 확인"이라는 명제를 깊이 사유[]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예술행위를 하는가?

스스로의 내면에서 분출하는 어떤 것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하는 일을 그저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에서든) 감상자를 염두에 두고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분야의 창작자들과의 작업에서(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또 창작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지만

전시, 출판, 공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하려는 시도를 할 때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는가?

그냥 일방적인 전달인가? 혹은 적극적인 유도를 할 것인가?


물론 장르에 따라, 혹은 상업성의 여부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예술가들의 "성공" 여부와도 큰 관련이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뭐, 흔히 말하는 순수와 변질의 모호한 경계선이라고나 할까... 

(요즘에도 예술가의 상업적 성공을 '변질'이라고 표현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순수 예술이나 상업예술이나 소구의 대상이 있어야 그 작업이 연속성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 대상과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때로는 나쁜 남자처럼 일방적으로 나를 따르기만을 요구해도 매력적일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주 순종적으로 다 맞춰줘도 불만이 많고 트집을 잡으려 할 때가 있는 것 보면 말이다.

나에게 돈을 주고 의뢰를 한 자이건 순수 감상자로서의 대중이건 그들은 창작자들에겐 권력자들이다.

이럴 땐 연극 "레드"의 로스코의 대사들이 떠오른다. 그 고집스런 화가의 자부심에 가득찬 대사들이.


제대로 된, 혹은 내 마음에 흡족한 '창작'이란 걸 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서 주로 감상자의 입장에서 보다보면

사실 창작의 기쁨 만큼이나 "공감의 기쁨"이란 걸 느낀다. 그리고 환호하게 된다. 그리고 즐기게 되고.

아마 이것도...... 중독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 역시 권력자가 되어간다. 

이거, 나쁘진 않다. 웬지 보상심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도 같고!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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