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람후기/전시

헬로 미켈란젤로 - 20170417

by lucill-oz 2017. 4. 17.
728x90




볕좋고 꽃좋은 봄날에 딸과 함께 나들이하다.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마땅치도 않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훨씬 더 자세히 나와 있길래

그대로 스크랩하는 것으로 정리하기로.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 ~1465 >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소규모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직후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에게 맡겨졌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여섯살 때 돌아가셨고 미켈란젤로도 다른 귀족들의 후손들처럼 고전 문법학교에 다녔지만

라틴어보다 그림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그는 열 세 살때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1년 쯤 지나서부터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그라나치를 통해 연로한 조각가 베르톨도를 알게 되었다.

베르톨도는 피렌체 출신의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의 제자였다.

베르톨도는 1491년에 사망했으나 젊은 제자 미켈란젤로의 재능이 워낙 탁월하였기에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궁에 방을 마련해 주고 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1년도 못 가서 로렌초가 죽고 그로부터 2년 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혼란의 시기가 지나고, 1496년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

미켈란젤로는 고대 조각에 대해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2세기 로마의 <잠자는 큐피드>를 모사한 적이 있었는데 진품과 너무 흡사하여

미술거래상이 이 작품을 고대 진품이라 속이고 팔아먹은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속임수임이 드러났을 때 미켈란젤로는 오히려 뛰어난 재능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첫 번째 의뢰인이 되어준 사람은 바로 그 모사품을 구입한 리아리오 추기경이었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그를 로마로 초청했고, 이 때 <바쿠스>와 <피에타>를 제작한다.

<피에타>는 무거운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절제되고 아름다운 날카로움을 표현했으며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다룬 심오한 작품이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피렌체 정부로부터 다윗상을 의뢰받는다.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동시대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게 되었고

<다윗>상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정치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 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 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4년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조반니 데 메디치가 레오 10세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영묘작업만을 고집했다.

수많은 재계약과 계약수정을 거쳐 마침내1545년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완성된 작품은 

당초의 웅대한 계획에 비해 매우 초라한 규모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아>와 <라헬> 등 대비되는 두 인물을 조각하여 2단으로 된 기념비의 하부작업만을 담당했는데

각각 행동하는 삶과 명상하는 삶을 상징하는 두 조각상은 웅장한 대리석 조각 <모세>의 양 쪽에 놓였다.

실물보다 크게 표현된 <모세>는 머리에 달린 뿔과 뱀처럼 구불거리는 긴 수염과 화난 표정으로 마치 괴물을 연상시킨다.


1534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선출되고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 교황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했다.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쉬지 않고 <최후의 심판> 작업에 매달렸다.

60대 노인의 강도높은 육체적 작업에서 비롯된 창조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89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소망에 따라 시신은 비밀리에 피렌체로 이송되었고

지금은 그가 어렸을 때 예술의 세계를 익혔던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 피렌체, 르네상스의 요람 >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된 배경에는 이탈리아 도시들의 눈부신 성장이 자리잡고 있다.

16세기 초, 북유럽 국가들이 봉건주의적 영주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자유로운 상거래와 과학적 탐구에 취약했던 반면,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자치권을 지닌 도시로서 교황과 영주의 간섭이 상대적으로 덜 해

경제력과 학문 수준을 크게 발달시킬 수 있겠다.


자유로운 사상과 인문학적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한 피렌체인들은 

소위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찬란한 유산을 발굴하여 재생시키는 일에

점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피렌체 도시의 가장 유력한 상인 가문 메디치 가(Medici Family)는 실질적인 도시의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

메디치 가문은 전통적으로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며 

대중 전반에 걸쳐 문화부흥 사업에 전폭적인 지지를 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특별히 미켈란젤로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Medici)가

'위대한 자'라고 불릴 정도로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권력자로 활동했다.


금융업과 교황청과의 거래를 통해 발생한 엄천난 부를 바탕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는 인문주의 학문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 적극 후원했다.

그의 후원 덕택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와 같은 위대한 천재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재능을 뽐내며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ALL ABOUT 미켈란젤로 >



르네상스의 전인 미켈란젤로


르네상스는 전인의 시대였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철학과 과학, 시학과 수사학 등 당대 최고의 학문을 섭렵했던 것처럼

그리스-로마의 가치와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고자 한 피렌체의 예술가들도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둘 모두 제도화된 학문기관에서 공식적인 출판물의 형태로 

학문 이론과 결과물을 대중에 남긴 위인들은 아니다.

현대인들이 다빈치 학문의 분야를 뛰어넘는 뛰어난 지적 결과물들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오로지 그가 남긴 스케치 노트 뿐이다.


미켈란젤로 또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고루 갖추고 있었던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전인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아이콘과 같은 <아담의 창조>를 만들어 낸 예술가이자 동시에 

뛰어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드로잉과 뛰어난 소네트 수백 점을 생산하는데 거침이 없었던 전인적 예술가였다.

현대에 떠오르는 학문간 융합과 통섭의 개념으로 봤을 때도 가장 이상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르네상스 전인들의 작품은 현대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어느 시대, 어느 맥락 속에 위치하더라도 유효한,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전인 미켈란젤로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을 통해 답을 내어놓았다.

신의 가장 뛰어난 창조물인 인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 근본 성품이 신을 닮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개념은 그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와 공방


피렌체 르네상스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미켈란젤로는 

이미 20대의 젊은 나이에 <피에타>와 <다비드>라는 명작을 만들어낼 정도로 

조각에 있어서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미켈란젤로가 이미 젊은 나이에 최고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적부터 위대한 스승들 밑에서의 도제 생활을 했던 배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열세 살의 소년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 1년간 도제 생활을 했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작업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기를란다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묘와 회화 기법에 있어서의 기초를 철저히 스승으로부터 배워나갔다. 

더불어 그의 스승처럼 고대 미술 주제와 양식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예술가로서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던 미켈란젤로이지만 

야심찬 천재였던 그는 공방에서의 배움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회화 장르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 스승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장르에 있어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결단을 내리고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나온다. 

메디치 가문 소유인 성 마르코 성당 내 예술 학교에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유명한 조각가인 베르토르도 디 조반니(Bertordo di Giovanni) 밑에서 조각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이미 20대가 되기 전 당대 최고의 회화 · 조각 분야의 대가들의 공방에서 배울 수 있었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피렌체에서 다빈치에 버금가는 명성 있는 예술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와 성 베드로 성당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기독교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건축사에 있어서도 가장 거대한 프로젝터를 시행에 옮긴다.

기존에 성 베드로가 묻혔다고 추정하는 장소 위에 지어졌던 대성당은

야만족들의 침입에 의해 번번히 피해를 입어 그 상징성의 빛이 바랬다.

기독교 세계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과 함께, 

당시 고전 건축 양식의 재발견으로 인한 르네상스 건축 사업의 부흥이 맞물려 거대한 대성당 건축이 결정되었다.


최초의 설계자는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였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 신전 양식을 차용하여 설계한 대성당의 최초 설계는, 

사방이 대칭을 이루며 ‘균형과 조화’라는 고대 미술의 미학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방형 성당이었다. 

그러나, 이 설계도에 따른 성당 건축은 엄청난 건축비 확보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각종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중도에 무산되고 말았다.


여러 명의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공사 총감독직을 맡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또한 이 위대하고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 건축의 책임자직을 맡아서 수행했다. 

미켈란젤로가 공식적인 공사 책임자가 된 것은 그의 나이 72세 때였다. 

이미 최초의 브라만테가 구상한 그리스식 정방향 십자가 구조는 변경된지 오래이며, 

건물의 통일성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성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일종의 ‘조각으로서의 건축’으로 접근했다. 

성베드로 대성당도 하나의 거대한 대리석이라면,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비례와 균형을 고려하면서 하나의 완결된 조각상을 만드는 메커니즘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입체감과 균형감을 위해 미켈란젤로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바로 원형 돔과 파사드이다. 

미켈란젤로는 수직으로 곧게 뻗어있는 파사드의 열주와 건물 전체에 통일성을 가져다 주는 거대 원형 돔을 통해 

성베드로 대성당을 인류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부활시켰다.





미켈란젤로와 르네상스 문학


르네상스 운동의 첫 출발은 문학이었다. 

16세기에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 본격적인 르네상스 부흥기가 시작되기 이전, 

14세기 피렌체는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라는 천재 시인을 배출했다. 

르네상스의 기본 정신은 고대 그리스와 라틴어 문명의 찬란한 유산을 발굴하여 그것을 복원하여 다시금 가공하는 일이었다. 

테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질적 유산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르네상스인으로 교육 받았다.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라틴어 문학에 있어서는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 작품을 학습했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연옥-천국’ 이라는, 그리스-로마 문학과 성경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단테를 이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칸초니에레』를 쓴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까지, 

이탈리아 문학은 이른 시기에 이미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고전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문법, 수사학, 윤리 철학, 역사 등 인문학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대학 기관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진다.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


비록 다빈치보다 한 세대 아래의 예술가였지만,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냈고 그 재능을 인정 받았기 때문`에 서로 경쟁 상대로 자주 거론되곤 했다. 

수학, 미술, 과학, 음악 등 당대 주요 학문 분과들을 넘나들며 활약했던 다빈치와 주된 관심 영역은 달랐지만, 

주로 회화와 드로잉과 같은 미술 작품 제작에 있어서 몇차례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피렌체 시의회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두고 각각 작품을 그려내는 경쟁이었다. 

미술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세기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나이 서른이 되어가는 젊은 미켈란젤로에게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 다빈치와의 경쟁에서의 우위가 

앞으로의 그의 성공가도에 틀림없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매우 중요했다. 

마찬가지로 다빈치에게도 이 경쟁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추앙받고 있었지만, 모든 피렌체 시민 앞에서 아직 새파랗게 젊은 조각가와 경쟁이었기에 

결코 지지 말아야할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일전이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와 피사(Pisa)와의 카시나 전투를, 

다빈치는 피렌체와 밀라노(Milano)와의 앙기아리 전투를 주제로 한 작품에 착수했다. 

두 전투 모두 피렌체가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고, 

두 화가는 자신들이 가진 재능에 더하여 새로운 기법과 아이디어로 

시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고양시킬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탄탄한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차 그의 최고의 걸작 <시스티나 천장화>의 밑바탕이 될 남성 누드화의 정수를 보여주게 된다. 

반면 다빈치는 새로운 물감의 발명과, 후대 바로크 미술의 주요 특징을 예견하는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화법을 선보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두 화가는 더욱 매력적인 제안을 받게 되어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다빈치는 밀라노로 향하게 되면서 천재 화가들의 공개 경쟁은 중도에 취소된다.


두 예술가는 평생에 걸쳐 라이벌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길거리에서 다빈치의 추종자가 그에게 단테의 시에 대해 물어보길래, 길거리에서 허름한 차림을 한 미켈란젤로를 두고 

비꼬듯이 “단테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미켈란젤로에게 가서 물어보라”며 큰소리로 답했다. 

문학을 사랑하고 특히나 단테를 가장 존경하는 시인으로 생각했던 미켈란젤로에게 

다빈치의 행동은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도 지지 않고 “작품 제작에 착수하면 제대로 마친 경우가 없는 다빈치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대꾸했다. 

둘 사이의 다툼은 이런 식으로 피렌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피렌체 최고의 예술가’의 지위를 두고 공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천재들이었던 셈이다.




미켈란젤로와 비토리나 콜론나


미켈란젤로 예술사로서의 삶에 있어서 존경과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으로의 여성은 오로지 성모 마리아뿐이었다. 

신에 대한 봉사와 사명으로 예술 활동을 수행했던 인물이 미켈란젤로였다. 

그래서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여성에 대한 사랑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미켈란젤로에게도 평생에 걸쳐 단 한 명의 정신적 교류를 했던 여성이 단 한 명 존재했다. 

페스카라 후작의 부인이었으나 미망인이 되어 시인으로 활동한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가 

바로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사랑이었다.


인문주의자적인 교양과 귀족적인 성품의 소유자인 비토리아 콜론나는 남편을 잃고 나서 평생토록 

죽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신의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썼던 시인으로서 주변 사랑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미켈란젤로와는,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을 제작하고 있을 즈음에 처음으로 알게 되어 만남을 가졌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제작하고 있을 당시에는 카톨릭 세력이 내외적으로 많은 비판과 어려움에 처해있을 시기였다. 

종교개혁과 카톨릭 교회의 부패라는 위기 속에서, 

비토리아 콜론나와 미켈란젤로는 종교적인 관점에 있어서 많은 공통점을 공유했다. 

카톨릭 교회의 개혁과 순수하고 절대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관을 서로 나누며 둘 사이의 우정과 신뢰는 점점 굳건해졌다. 

예술가들에게 뛰어난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와 같이,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 구성에 있어서 콜론나는 공공연히 많은 영향을 주는 여성으로 활약했다.


노년의 미켈란젤로가 뒤늦게 인간적인 감정의 분출을 경험하며 

수많은 편지와 드로잉, 소네트를 그녀에게 바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작품 속에서는 결코 에로틱한 상징성을 지닌 작품을 거의 그려내지 않았고, 

철저히 숭고하고 위대한 신앙의 상징성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또한 평생에 걸쳐 정립시킨 인체 누드화에서처럼, 살과 근육과 피부를 지니고 심장으로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다. 

1547년에 비토리아 콜론나가 숨을 거두자 미켈란젤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의 이마와 얼굴에 입술 한 번 대보지 못하고

 단지 손에만 입맞추고 그녀를 떠나보낸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이다. 

선배격 예술가들인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선구자적인 자세로 새로운 작품과 혁신을 창출해나갔던 사람들이라면, 

라파엘로는 르네상스를 관통하는 모든 회화적, 조형적 기법과 테크닉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그 결정체를 선보였던 ‘종합적 예술가’에 가까웠다.


라파엘로는 괴짜 천재와 같은 이미지로 전혀 사교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는 달리, 

로마 교황청에서 주로 활동하며 교황의 총애 가운데 작품 활동을 했다. 

외모와 성품이 훌륭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주변 사람들이 많았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에 착수했을 무렵, 

라파엘로도 피렌체에서 로마로 건너와 바틴칸 궁 안의 ‘서명의 방’ 안에서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성당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많은 조수들과 함께 이동하던 라파엘로는 홀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늘 외로워 보이시는군요.” 

얼굴을 잔뜩 찌푸린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자네는 항상 조수들을 거느리고 다니는군. 마치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에서 라파엘로가 완성한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바로 <아네테 학당>이다. 

작품 중심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얼굴을 미켈란젤로의 얼굴로 그리는 등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미켈란젤로와는 다른 예술관을 추구하며 활동했던 화가가 라파엘로였다. 

미켈란젤로가 장수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것과는 달리, 

로마 교황청이 사랑한 아름다운 외모의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로마 판테온의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혔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 전시장 구성 >




내용면에서 예상보다 훨씬 알찬, 좋은 전시였다.


자주 생각하는 바이지만......

미켈란젤로 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이

그들 작업의 재료비와 소요 경비, 노동력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 결과물의 가치로 인정받아야 하고, 그 가치의 댓가를 보수로 받아야 하거늘,

예나 지금이나 살아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그만한 대우를 받는 예술가가 몇인가.

그나마도 누군가 후원자가 있던지, 아니면 스스로 그 제작비를 조달해야 하는 실정인데

정작 나중에 엄청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따로 있으니...ㅎㅎ


후대에 우리가 위인전으로 배우게 되고, 남겨진 작품으로 만나게 되는 그 거장들도 

당대에는 그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생활인이었다는 사실.

(천지창조 전시관에 발주처인 성당과의 계약서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노구를 이끌고 힘든 자세로 작업을 하고, 그러다 병을 얻기도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그들은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행복했을 것이다.




728x90

댓글